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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성육신(요한복음 1:14)
최세창
- 1976
- 2019-12-20 22:55:44
먼저, 사도 요한은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하였다.
“말씀”은 1:1의 주석을 보고, “육신”(σὰρξ)은 1:13의 주석을 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성적 영혼을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인간의 본성”(J. H. Bernard)을 가진 존재가 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재를 전제한 성육신에 대해 자세하게 논할 필요가 있다.
요한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성육신에 대해,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라고 하였고,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체 곧 인간으로 오신 것을 말하고 있다.
불트만(R. Bultmann)은 “바울은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고, 지상에 사셨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는다.”1)라고 하지만, 실제로 바울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전 구원 과정의 근본적 기초가 되는 중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를 주장하였다(요 1:1, 요일 1:1, 2, 13, 4:3, 9, 14, 롬 8:3, 고전 8:6, 엡 1:4, 3:11, 빌 2:6-8,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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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trans. by K. Grobel. Vol. 1(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54), p.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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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이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교리는 형이상학적 명상이라기보다는 구속의 평범한 사실들로부터 얻어진 확증적 추론이다.”2)라고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J. Calvin)3) 신의 영적인 영광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았었다(A. Deissmann).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점에 대해,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즉, 그분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셨다(골 1:15).”5)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아들 됨이란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그리고 존재가 완전하게 계시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성육신이란 하나님께서 육신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요 1:14, 요일 4:2, 롬 1:3, 8:3, 9:5). 이 점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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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 S. Stewart, A Man in Christ(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64), p. 316.
3) J. T. McNeill, ed.,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rian Religion, Vol. 1. translated and indexed by L.Battl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p. 465.
4) A. Deissmann, Paul. trans. by W. E. Wilson(Peter Smith, 1972), p. 236.
5) J. S. Stewart, op. cit.,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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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을 가짜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루터(M. Luther)는 “역설적 사건인 성육신은 지상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이며, 신비이므로 아무도 독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인간의 이성 및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이다.”6)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성육신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논할 수밖에 없다.
성육신이란 성부께서 성자를 파견하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8:3에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하였다.
바르트(K. Barth)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익숙해 있는 이 일시적이며 타락한 세계 곧 우리가 결국 생물학적 범주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는 자연이라 일컫는 이 질서로, 그리고 우리가 경제적 물질주의의 견해로부터만 해석할 수 있는바 역사라고 일컫는 이 질서로, 즉 사실상 이 인간성과 이 육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7)라고 설명하고 있다.
성육신이란 성부의 파견인 동시에 성자의 자발적 행위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빌립보서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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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원용, 루터의 사상(서울: 컨콜디아사, 1971, 3판), p. 165.
7) K. Barth, op. cit., p.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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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심이라”라고 하였다.
칼빈(J. Calvin)은 “자진하여 그분은 본래의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우리와 같은 인간의 아들이 되시기 위해 우리의 본질을 취하셨다.”8)라고 설명하고 있다.
루터(M. Luther)는 “그리스도의 본질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합은 인간의 이해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비밀이다.”9)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다. 김광식 님은 “바르트(K. Barth)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는 ‘보라! 네 하나님이시다’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보라!’도 포함되어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반영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래성의 반영이기도 하다.”10)라고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의의는 올바른 하나님 인식의 근거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골로새서 1:15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근거 삼아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가 가장 완전히 계시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11)라고 하였다.
칼빈(J. Calvi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결정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신적 엄위를 만나야 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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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J. T. McNeill, op. cit., p. 465.
9) 지원용, op. cit., p. 167.
10) 金光植, 現代의 神學思想(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75), p. 129.
11) J. S. Stewart, op. cit.,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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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안에서 우리의 참 신이신 그분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12)라고 하였다.
성육신의 둘째 의의는 참 인간의 계시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라고 하였고, 바울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라고 하였고,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씀들은 마귀의 덫인 죄에 매여 사는 인간들에게, 되어야 할 자기의 모습과 취해야 할 행동 양식에 있어서 본받을 대상의 출현이라는 중대한 의의를 내포하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에 대해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참조: 롬 3:10)라고 하였고, 또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하였다.
위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두가 왜곡되고 상실된 인간이므로 인간들 중에서는 참 인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참 인간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라고 하였다.
바르트(K. Barth)는 하나님의 인간성을 모든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의 근원과 규범이라고 하였다.13)
성육신의 셋째 의의는 메시아의 출현이다. 이 점에 대해 바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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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W. Niesel, 칼빈의 신학. 이종성 역(서울: 大韓基督敎書會, 1973), p. 105.
13) 金光植, op. cit., p.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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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5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고; 빌립보서 2:8에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지상에의 메시아 출현이란 그분의 구원의 사랑이 영원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엡 1:4). 그러한 의미에서 성육신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긍정이고, 역사 안에서의 구체적인 구원 행위의 효시이며,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란 영원한 구원 행위의 완전한 성취인 것이다.
골로새의 이단을 반박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우주적 구원자이시라고 선언하였다(골 1:15-20). 이 선언 속에는 인간을 죄의 종으로 삼아 멸망의 길로 끌고 가는 마귀, 즉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권세를 압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함축되어 있다. 보다 분명하게, 요한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라고 선언하였다.
지금까지 논해 온 성육신의 의의란 곧 성육신의 목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칼빈(J. Calvin)은 “우리의 구속자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라는 사실은 절대적이다. 구속자의 과제는 죽음을 삼키는 것이었다. 생명이신 그분이 아니고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의 과제는 죄를 정복하시는 것이었다. 의이신 그분이 아니고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의 과제는 세상과 공중의 권세들을 뿌리뽑으시는 것이었다. 세상과 공중의 권세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그분이 아니고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생명과 의와 주님 되심과 하늘의 권위는 하나님께만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려고 의도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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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때, 자신의 독생자의 품격 안에서 스스로 구속자가 되셨다.”14)라고 주장하였다.
사도 요한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 대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다. “거하시매”는 에스케노센(ἐσκήνωσεν)으로서 ‘장막이나 천막에 거주하다’, ‘정착하다’, ‘거처를 정하다’ 등을 의미한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 대해서 트렌취(Trench)와 모페트(Moffatt)는 인간의 몸(고후 5:1, 4, 벧후 1:3 참조)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표현한다고 하였다.15) 그러나 반즈(A. Barnes)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하고, 또 “그 안에 쉐키나(Schechinah: ‘거주’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현존 또는 현현을 의미하는 유대교 신학의 특유한 관념을 말한다<역주>), 또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상징이 나타나는 유대인들의 장막을 암시한다고 하는 견해”(J. A. Bengel)도 반대하면서 단순히 말씀이 성육신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16)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 대해, 버나드(J. H. Bernard)는 “예수님의 공적 근무를 증언한 사람들과 더욱 특별하게 매일의 영적 교통을 통해 예수님과 교제한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다 더 자세하게 반즈(A. Barnes)는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셨다. 즉, 잡수셨고, 마셨고, 주무셨고, 그들과 함께 수년 동안 계셨다. 그래서 그들은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고, 주목했고, 손으로 만졌다(요일 1:1).”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어떤 사람이 장막 안에서 함께 거하는 것은 그의 가족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한이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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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J. T. McNeill, op., cit., p. 466.
15) in 이상근.
16) J. H. Bernard: Origen과 Chrysostom은 성육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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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그들과 함께 장막에 거하셨다고 말할 때, 그는 예수님이 그들과 한 친구나 가족 중 한 사람과 같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과 친밀하게 접촉할 기회가 충분했으며, 따라서 예수님이 실제로 인간이셨다는 점을 잘못 인정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의 “우리”에 대해 벤겔(J. A. Bengel)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 국한시키고, “그 영광”에 대해 반즈(A. Barnes)는 변화산의 사건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상근 님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도들 전체가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서 얻은 총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설명에, 카손(D. A. Carson)과 黑崎幸吉처럼, 복음 전도자와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목격한 그리스도인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보다 적합할 것이다.
“영광”은 독산(δόξαν)으로서 {바울 서신에 75번 나타난다. 이 말은 관련되기는 하지만,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진 말이므로 보다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유익하다. 명사는 동사 도케오(δοκέω)와 관련되며, 의견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Ⅳ Macc. 5:18). 나아가서 이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한 좋은 견해 곧 ‘칭찬’, ‘찬양’, ‘명예’, ‘경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흔한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Kābhōdh는 ‘무게’, ‘무거움’, ‘짐’(사 22:24)이라는 기본적인 의미가 있으며, 여기서부터 ‘물질’, ‘부’, ‘존엄’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31:1). 나중에 ‘빛남’, ‘광휘’, ‘광채’, ‘훌륭함’의 요소가 물질의 의미에 덧붙여졌다. 이와 같이 그 말은 여호와의 임재에 관한 찬란한 물질적 명백성을 지시하는 데 사용되었다(출 16:7, 사 6:1-5).
바울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⑴ 피조물 또는 그에 속한 것에 부여된 ‘찬양’이나 ‘영예’이며, 그 반대말은 ‘욕됨’(고후 6:8) 또는 ‘부끄러움’(빌 3:19)이다. ⑵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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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돌리는 ‘숭배’나 ‘경의’(롬 3:7, 23, 4:20, 11:36, 고전 10:31 등)이다. ⑶ 어떤 사람에게 명예나 영예를 돌리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의 영광을 높이는 덕이 있는 사람이다(고전 11:7, 15, 고후 8:23, 살전 2:20). ⑷ ‘외적인 빛남’, ‘광채’, ‘찬란함’, ‘광휘’이다(고전 15:40, 41). ⑸ 하나님께서 빛나는 구름에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롬 9:4). ⑹ 하나님(롬 1:23, 고후 4:6) 또는 그리스도의 명백한 탁월성, 절대적 완전, 왕적 존엄이나 장엄이다(고후 3:18, 4:4, 딛 2:13, 살후 1:9). ⑺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롬 6:4)이다. ⑻ 하나님과 접촉하거나 접촉해 온 자들을 둘러싼 빛이다(고후 3:7). ⑼ 그리스도께서 이미 들어가셨고, 또한 신자가 들어갈 복된 나라나 장소이다(롬 8:18, 딤전 3:16). ⑽ 인간 혹은 사물의 탁월함이다(고전 15:43, 고후 3:10, 엡 1:6, 14, 18, 빌 3:21, 4:19)}(빌 1:11의 주석).
여기서는 하나님 곧 절대적 완전자로서의 탁월한 존엄과 장엄한 사랑의 권능과 찬란한 광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하는 것이다. 바레트(C. K. Barrett)는 “외아들(모노게네스, μονογενής: 1:18, 3:16, 18, 요일 4:9)과 아버지(파테르, πατήρ)는 요한 문헌에서 매우 특징적인 말들이며, 동시에 신학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인 말로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과 같은 영광’이라고 번역할 수는 없다. 더우기[더욱이] 모노게네스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는 ‘그 종류 중 유일한 것’을 뜻하지만 아버지와 관련해서 사용되었을 때는 독생자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다.17)"라고 하였다.
“독생자” 곧 외아들은 모노게누스(μονογενούς)로서 사도 요한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적용시키고 있다(1:18, 3:16, 18, 요일 4:9). “하나밖에 없는 자녀가 부모에게 특별히 소중한 존재이듯이 특별하게 사랑받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이러한 설명들은 모두 구세주에게 해당되는 것이다”(A. Barnes).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이란 영화된 은유나, 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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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참조: Dodd, Interpretation, 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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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인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기원”(A. Clarke) 또는 “예수님의 신성”(R. Earle)을 강조하는 것이다. 존슨(S. E. Johnson)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또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모든 복음서들이 유대 문학과 대조적으로 메시아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라고 하였다}(막 1:1의 주석).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성부와 신자의 관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유일한 아들로서 신적 본질을 공유하는 이시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라는 견해와 같으며, 또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엡 1:3의 주석)라고 하였다.
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나 속성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부터 아들로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포시트(P. T. Forsyth)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독생자만 있으시고, 많은 자녀들은 유일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이다.”라고 하였다}(요일 1:2의 주석).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곧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의 내용 중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본질 또는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창 24:27, 32:10, 출 34:6, 시 25:5, 10, 26:3, 33:4, 5, 40:10, 11, 61:7, 89:2, 14, 92:2, 98:3, 100:5, 115:1, 117:2, 롬 15:8, 9).
“은혜”(카리토스, χάριτος) 곧 {헬라의 인사말이기도 한 은혜(카리스, χάρις)는 “우리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M. Henry),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R. T. Stamm), 그리고 “죄인인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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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쏟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E. Huxtable) 등의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는 아직 카리스(은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카리스(은혜)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의미란 곧 ‘죄의 용서’(M. Luther, R. C. H. Lenski)이다. 하나님의 은혜 중 은혜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현된 속죄의 사랑이며(롬 5:7),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특수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 때, 일반적인 은혜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누가복음 15:11 이하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께로부터 많은 선물(은혜)을 받았으나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그 선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음과 멸망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죄악의 사슬에서 구속받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은혜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이 구속의 은혜야말로 모든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다}(갈 1:3의 주석).
“진리”는 알레테이아스(ἀληθείας)로서 {그 원형인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는 α(否定)와 λήθω(λανθάνω: 감추다)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원래는 ‘숨기어 있지 않다’, ‘광명한 빛 속에 있다’, 또는 ‘공명정대하다’라는 뜻이다”(유동식)}(요일 1:7의 주석). 이 낱말은 “때때로 일반적인 그리스어 용법에서처럼 단순히 ‘사실에 일치하는 것’, ‘거짓이 아닌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5:35, 8:40, 44-, 16:7). 그러나 보다 특징적으로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고 드러난 그리스도교적 계시를 의미한다”(C. K. Barrett).
여기서 진리란 빛으로 묘사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의지와 행위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의 진리는 학문이나 도덕적인 진리 또는 인간적인 진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에서 극명해지는 것이다.
“충만하더라”는 플레레스(πλήρης)로서 하나님의 본질 또는 본성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넘쳐흘렀다는 뜻이다.
출처: 최세창, 요한복음(서울: 글벗사, 2006, 1판 2쇄), pp. 7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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