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職)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오재영
  • 2647
  • 2020-01-18 20:48:25
대통령(職)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오늘 무한경쟁의 변화 많은 시대 나라마다 너나없이 생존에 올인 하고 있는데.
우리가 속한 우리의 조국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혼란스럽고 어렵다고 모두가 아우성들임에도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께서는 지금, 어떤 생각 속에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다. 얼마 전 신년기자회견의 장면은 더욱 보는이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물론 우리의 원초적집단인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일도 쉽지않으니 그에 비하여 5천만이 넘는 전 세계 10위권에 드는 국가를 경영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이는 자신이 전능하신 신이 아닌 존재이기에 남에 비하여 나름의 장점이 있어도 그도 약점을 지니고 있는 한사람의 연약한 인간이다. 그러하기에 좋은 지도자일수록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갈 적임자들을 찾아 ‘적재적소’에 세우는 것이 무한 경쟁시대에 접어든 국가의 운명의 책임을 지고 있는 이로서 감당해야할 고독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지도자라면 그는 당연히 자신을 더욱 낮추는 겸전함으로 모두를 위하여 넓게 포용하는 마음을 가져야함이 필연이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목전에 등장한 역대(歷代)의 대통령들마다 나름의 역할과 함께 공과가 있으나 아쉬운 점은 섬김과 희생의 모습보다도 군림(君臨)의 자리에서 소수의지지 세력을 기반으로 다수의 많은 이들을 소외시킨 채, 파벌과 진영에 갇혀 헤어나지를 못하는 모습들이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했다.

정치는 이류(二流) 인물들이 하는 것 인가?

위의 단어는 고 함석헌 선생께서 하신 말씀으로 전해진다.
성경에도 등장하지만(삿9장의 아비멜렉).도대체가 오늘의 정치판에 자칭 지도자라 하여 나서는 이들치고 기본 상식에 맞는 상대를 향한 예를 갖추며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드러나는 모습들이 하나같이 직위를 이용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올라 자신의 안위를 위한 욕심을 채우기에만 급급했을 뿐 본인들이 앞에서 한 말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에 많은 이들이 실망을 지나 충격을 받는 일이 많다보니 이제는 보통일상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그 부끄러움을 합리화 하기위하여 온갖 궤변(詭辯)과 억지, 꼼수와 요설(饒舌)을 늘어놓아 보고 듣는 이들을 더욱 분노케 한다. 이러한 이들에게 조국의 운명이 걸려있는 책임을 맡길 수가 있겠는가?

과거와 달리 시대가 발전하여 현재는 그런대로 얼렁뚱땅 넘기며 요행히 숨길 수는 있어도 잠시 후에는 모두에게 낱낱이 드러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우리는 그에 따르는 아픔에 시달리며 애꿎은 민초들이 그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지나온 시대, 국가의 경영에 참여한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중에 누구하나 원만하게 임기를 마치고 존경을 받는 이들로 마친 이들이 있는가? 모두가 앞선 이의 장점의 계승을 무시하고 흔적지우기에 급급하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자하는 마음도 없이 그저 무조건 자신만의 자칭의(義)에 사로 잡혀 주변의 천박한 이들의 열광에 기대어 본인의 부덕함도 모르고 권세를 이용하여 한(恨)풀이에 몰두하며 겸손하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누구에게나 맡겨지지 않는 그 자리에서 막중한 책임을 깨달아 두루 인재를 찾고 구하는 일에 전념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세워 책임을 맡긴다면 그 열매는 본인을 비롯한 국가의 국민 된 모두의 홍복(洪福)이 될 것이 아닌가?

지도자는 남이 아닌 본인 스스로 무너진다.

현명하고 책임 있는 지도자는 남이지적하기 이전에 본인 스스로 자기성찰(自己省察)에 매진해야한다.
그리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값싼 칭찬 또한 경계해야한다. 누구에게나 적당한 칭찬은 격려가 될 수가 혹 있지만, 그러나 도에 지나친 칭찬은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예수회의 로메로 신부는 “진리는 반대자들의 잦은 비방 보다는 옹호자들의 열광에 의하여 썩어버린다”고 했다. 그가 누구이든 지도자 된 이가 자신에 대한 칭찬을 즐기기 시작하면 그는 그 순간부터 실패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며 어리석은(愚)이로 부패하기 시작을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명한 지도자들은 칭찬보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겸허히 들을 수 있도록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말처럼, “군자는 현명한 사람을 보면 함께하지만, 소인은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시기하고 모함한다. 또 “군자는 자신이 했던 말을 굳이 고집하거나 눈에 보이는 결과를 좇지 않고 오직 옳고 그름에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하는 것이다.

벌써 2년이 지났다. 스크랩한 강천석 논설 자문위원의 칼럼이 생각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그의 주장에 공감을 하면서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글의 내용 중에 국가의 경영을 책임진 대통령은 어느 순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그래서 별수 없이’가 나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했다. 이 갈림길의 선택이 그 대통령의 운명을 가른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救)한 인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수도 있고 잘못되고 그른 선택으로 지지 세력과 이익 집단에 늘 끌려 다니다 나라를 결딴내고 말았다는 혐오의 인물로 기록되기도 한다.

대통령에겐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있다.

대통령에겐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있다.
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다.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는 이 일들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고 이 일들의 조합(組合)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성공하는 대통령은 ‘해야 할 일’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을 골라 우선 전력(全力)을 다하는 것이다. 현재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제일성(第一聲)은 ‘일자리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일자리는 대통령의 구호나 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만든다. 그러기위해서는 기업의 사기(士氣)를 북돋워줘야 한다. 모두가 돈이 드는 일도 아니건만 이 정부는 순서를 뒤집어 대기업 때려잡기로 시동(始動)을 걸었다. 그들이 말하는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복지와 분배구조가 잘 구축된 나라다. 그러나 현재의 스웨덴 정치와 경제의 틀을 만든 지도자는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다. 취임당시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의심 받던 그가 취임 후 취한 첫 조치가 매주 목요일 재계(財界) 지도자와 만찬을 정례화한 것이었다. 재계와 신뢰가 무르익자 여기에 노조 지도자를 합석시켜 현안을 논의 했다. 이 ‘목요 클럽’은 1946년부터 1968년까지 재임(在任) 23년간 거른 적이 없었고, 휴가철에는 노사정(勞使政)이 총리의 오두막 별장 근처에서 휴가를 같이 보냈다.

대통령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국민 분열을 부추기는 행동이다.
국가 안보와 직결(直結)된 국방·외교 정책을 전환할 땐 국민 단합(團合)을 먼저 다져야 한다. 대통령이 미국 방문 때 만나기도하고 대통령에게 조언(助言)도 한다는 미국 외교협회장 리처드 하스는 이를 가리켜 ‘외교는 안방에서 출발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현 정권의 북핵(北核)과 대북정책은 좋게 말해 ‘대전환’, 사실대로 말하면 국가 안위(安危)와 국민 안전을 건 도박이다. 반대와 회의론(懷疑論)의 입을 막고 싶어서일까, 적폐청산이 1년 반 넘게 이어지면서 온 나라에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하다. 남북대화 자문을 받는다는 청와대위원회는 다른 색깔은 끼어들 틈도 없이 홍일색(紅日色)이다. 대통령은 ‘하고 싶은 일’앞에서 그것이‘국민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인지 되물어봐야 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는 것은 함정이다.

정치 세계에선 ‘무엇을 할 것인가’하나만으로 되는 일은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어떻게 할 것인가’와 만나 짝을 이뤄야 결실(結實)을 맺는다. 어떤 정책도 목표·의도(意圖)·동기(動機)만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지금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기위한 정책이 실제론 경제적 약자를 괴롭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국민을 배신(背信)한 정책이다. 대통령과 시민 단체 대표를 가르는 경계선(線)은 ‘결과에 대한 책임’ 여부다. 그동안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던 시민단체와 종교인들에겐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질 의사도 능력도 없다. 대책 없는 탈(脫)원전 정책으로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정전(停電) 사태가 닥쳐온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시민단체와 종교인들의 정부 참여가 늘어날수록 이 정부는 무책임한 정부가 돼간다.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책임의 위치에 있는 지도자는 때로는 자기 세력의 기대와 등질 각오를 해야 한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은 군부(軍部)지지를 배경으로 10년 만에 권력의 자리에 복귀했다. 식민지 알제리 독립문제로 나라가 두 쪽으로 갈린 상황이었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던 군부는 드골이 자기네 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드골은 알제리문제가 프랑스번영을 가로막는 족쇄라고 판단, 독립허용으로 방향을 틀었다. 회고록의 그 이후 대목이다. “1962년 8월 22일 아내·사위·운전사와 함께 비행장으로 향했다.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기관총 여러 대가 사격을 가해 왔다. 저격수는 차를 타고 쫓아오며 사격했다. 그들이 쏜 탄환 150발 가운데 14발이 차체에 박혔다. 그래도 드골은 드골의 길을 가야 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앞길을 가로막는 세력은 대통령의 비판자가 아니라 우군(友軍)이다.
민노총·전교조·참여연대·민변(民辯)·우리법연구회 등이 그들이다.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지지 세력이란 감옥의 옥문(獄門)을 열고나올 수 있을까, 아니면 ‘별수 없이’우군의 포로로 관성(慣性)의 정치를 계속하게 될 것인가, 가능성이 보여서가 아니라 그 길밖에 희망이 없어 하는 말이다.

지금도 주변의 염려하는 이들의 다양한 아픔의 소리를 들으며 기도드린다.
자신의 명예나 입신영달(立身榮達)의 천박한 욕망(慾望)이 아닌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특출하여 미래 후손의 번영에 자신의 희생을 드리는 지도자들이 일어나게 하여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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