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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4차대각성 운동과 웨슬리의 신앙
현종서
- 4013
- 2020-01-15 09:39:08
18세기초에 앵글로색슨계 미국인의 종교 역사에서 빠르고 극적으로 나타난 신앙부흥운동이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의 경건주의나 영국의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이 그 원천으로서 미국사회속에 기독교의 토착화 운동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미국의 대 각성운동은 크게 4차까지 있었던 것으로 본다.
제1차 운동 1735-1755
제2차 운동 1790-1840
제3차 운동 1850-1900
제4차 운동 1960-1981
대각성 운동은 영국 식민지 당시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나타났다. 뉴잉글랜드의 메마른 합리주의와 중부 식민주들에 분포해 있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예배의식에 집착한 형식주의, 그리고 남부의 목회감독소홀 등을 반대하고 극복하여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계약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이다. 부흥운동은 초교파적으로 일어났다.
1차 대각성 운동에서
주요인물인 조지 휫필드는 성공회 목사로서 촬스 웨슬리에 의해 죤 웨슬리가 지도하던 홀리클럽멤바가 되었던 인물이다. 먼저 성령을 체험하고 대형집회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1739~40년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여러 식민주를 돌아다니며 교파를 초월하여, 들판에서 설교를 하며 미국 전역에 신앙의 활기를 새롭게 불어넣었다.
메사츄세츠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목사는 위대한 학자이자 변증자이며 회중교회 목사였다. 에드워즈 목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는다고 설교하여 회중들은 그의 지옥설교를 두려워하였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다.미국의 최초 복음주의 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티모어에 미 감리교회를 세운 프랜시스 에즈베리(1745-1816), 그의 말타고 다닌 순회 속회 운동- 웨슬리 복음전도 정신으로 영국 이민들이 모여 사는 곳 마다 방문 전도함으로 감리교회, 미 감리교회의 기초를 이루었고, 그가 감리교회 초대 감독이 되었고, 미국 건립의 위인과 성자 반열에 들었다.-그의 이름으로 된 신학교,대학교들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감리회가 건립 100주년 되었을때 이 교회의 담임이었던 가우처 박사는 조선선교를 위해 미화 5천불(처음 2000불, 나중에 3000불을 더하여)을 미감리회 선교위원회에 기탁하였고 그 열매로 메클레이-아펜젤러,스크랜턴으로 이어지는 한국선교를 하게 된 것이었다.
2차 대각성 운동
프랑스 혁명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과히 종교적이었다. 찰스 G. 피니는 데이비드 흄, 볼테르의 영향력이 미국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만일 이런 이신론의 사상이 주입될 경우 미국이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부흥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1792년 8월 29일– 1875년 8월 16일)는 미국 장로교 목사로서 뉴욕 북서부와 맨하튼에서 1825년-1835년 기간동안 혁신적인 부흥운동가로 가장 잘 알려지게 된다. 그는 구파 장로교 신학을 반대하고 기독교 완전주의를 주장하며 여러 글들을 남겼다. 그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고 여성과 흑인들의 교육과 같은 사회 개혁을 증진하였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받아드려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회개에 대한 강조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리스도의 의의전가교리의 칭의교리가 불합리적이며, 개인의 경건에 대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그들이 결심만 한다면, 그들의 삶에서 완벽하게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완전성화교리) 즉, 완전순종이 칭의의 조건이라고 설파하였다.
제2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 선교협회들이 조직되었다. 이 기간 동안 켄터키 주에서도 야영집회 방식의 부흥운동이 발전했으며 19세기 내내 미국 개척지에 영향을 주었다.
종파간의 분쟁과 경쟁의 시대에 이 대각성 운동이 전(全) 그리스도 교회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목사들의 설교 방식도 변하기 시작했다. 부흥 설교자들은 죄인에 대한 '율법의 경고'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을 강조했다.
미국 독립 혁명 시대에 1740년대의 복음주의 운동은 민주주의 사상을 전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사람의 참값은 그 사람의 계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에 있으며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성경 내용을 가르침으로써 "18세기 중반의 청교도주의...와 복음주의의 유행은 사회계층이라는 전통적 개념에 도전을 불러일으켰다." 또 이 운동은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일부분으로 노예 제도 폐기에 기여하여 남북 전쟁으로까지 이끌었다.
제3차 대각성 운동은 평신도들이 영적 각성의 주도세력이었다.이 각성운동은 미 대공황과 세계 2차 대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뉴딜 정책도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또한,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프린스턴·다트머스·브라운·러트거즈 대학 등을 포함한 여러 교육기관이 발전하였다.
“1857년 9월 23일 정오에 Lower 맨하탄 지역 Fulton가에 있던 교회 3층의 빈 강의실에서 당시 젊은 사업가였던 예레미아 랜피어 (Jeremiah Lanphier)가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던 그에게 다른 사람들을 붙여주셨고 여섯 명의 사람이 같은 기도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되었던 기도가 1858년에는 5만 명 이상이 매일 모이는 기도 운동으로 변하여 큰 심령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뉴욕 시내에만 3만 명 이상의 실업자들이 있었으며 은행들이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 이 기도 운동을 위해서 매일 정오부터 1시간동안 가게들과 소방서와 음악홀과 극장을 열어 기도 모임을 가졌다. 이 운동은 전국에 퍼져 무려 백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 지금은 랜피어 성도가 걸으며 기도했던 Lower 맨하탄이 세계 금융과 투자의 센터(Wall Street)가 되었다.”
같은 무렵 필라델피아와 뉴져지에서는 “1857년 11월 23일 몇 명의 대학생들과 대학 졸업생들이 마음에 부흥을 위한 큰 부담을 가지고 매일 조그마한 살롱에 모여 회개의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 수는 곧 불어났고 그들의 기도는 무엇인가 폭발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1858년 3월 10일에는 2천5백 명이 모여 기도했고 장소가 비좁아지자 결국 벽을 제거하고 장소를 크게 넓혀 매일 6천 명이 모여 기도하게 되었다.3월말에는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어 필라델피아에 있는 각 교회가 문을 열어 매일 저녁 최소한 한번의 기도모임을 가졌고, 어떤 교회들은 하루에도 세번 내지 다섯번씩 기도 모임을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교회로 찾아들었고 그 사역을 위해 당시 2천 불이 되는 큰 천막(Canvas tent)을 사서 1858년 5월 1일부터는 그곳에서 예배를 시작하였다. 5월 1일부터 4개월동안 이 캔버스 텐트 미니스트리에 참석한 연인원이 15만 명이나 되었다. 그 당시 필라델피아 인구가 30만 명 정도였을 때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뉴욕 맨하탄과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1858년 같은 해 뉴져지에 퍼지게 되어 몇 주 동안에 6만 명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프린스톤 대학 전체 학생의 40%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18%가 신학을 하여 목사와 선교사가 되겠다고 헌신하였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뉴져지에서 일어났던 이 부흥의 불길은 동부 및 전국으로 퍼졌고, 이를 제3차 대각성 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875년에는 평신도 전도자로 디엘 무디가 일어나 시카고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했다. 구두판매원출신다운 쉽고 설득력있는 무디의 설교와 감성을 자극하는 가수 아이라 생키(1870년 무디의 전도사업에 참여)의 성가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갖게 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전도했는데,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남북전쟁때는 전쟁터에서도 설교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교자로서의 활약상은 청년들이 해외선교 특히, 아시아와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했다. 무디성서학교(1886년)와 마운트 헤르몬 학교를 설립하는 업적도 남겼다.
제3차 대각성 운동은 미국을 구했고, 그 후 수많은 선교사들이 세계로 파송 되었다. 그들 중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년, 조선에 그 민족의 영혼들을 구하기 위하여 도착하였다.1885년과 그 후, 조선이 동학란, 청일전쟁, 민비시해사건, 노일전쟁 등으로 가장 위기에 있을 때 그 선교사들은 사랑과 희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 선조들에게 전하여, 그들은 복음을 받고 천국에 소망을 두어 그 어려운 시기를 이길 수 있었다. 또 1903년 강원도에서 하디의 회개운동이 촉발되어 한국교회는 각 지역에서 간헐적으로 집중적으로 기도와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결과, 1907년 1월 초에 강한 성령의 역사로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났다. 3년 후인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학살했으며, 또 1950년 한국전쟁 때 다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는 대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3.1운동, 상해 임시정부, 대한민국 건립을 하였다.
제4차각성운동
20세기중반 2차세계대전후 미국에서는 어느때보다도 영적 갱신이 요구되었다. 이혼율 급증-4가정중 1가정이 이혼,알콜 중독자가 600만명, 자유주의가 대부분의 신학교를 포함한 고등교육기관을 점령, 이때, 빌리그래함,오랄로버츠,빌브라이트등이 일어나 불신자들에게 구원의 메시지 크리스챤들에게는 갱신의 메시지를 외쳤고 미국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한국을 영적으로 각성시키고 포함한 세계 여러나라, 공산권의 국가들에게도 복음을 널리 전하였다.
한국교회도 그의 영향과 더불어 세계여러복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부흥시키더니 올림픽도 유치하고 세계복음화 성회도 하였고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엄청난 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고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민족이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미 대 각성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에 구라파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이 있었고 1940년대 이후에 한국에도 그런 자유주의 신학이 흘러 들어왔다. 이성중시의 신학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진화론, 유물론, 성경고등비평, 성경의 계시성과 권위,기적 사건 부인,인본주의 철학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해석하는 것 등이다. 구라파의 경건주의나 정적주의의 전통대신에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인간 이성의 긍정과 당시의 자연,인문 과학적 성과를 인정,그런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성서를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계시진리가 속박되거나 왜곡되거나 부정되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성서는 초이성적인 계시이므로 그러한 세계관속에 묶여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 진리를 증언해야 바른 신학일터,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하에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책이므로 적지않은 오류가 있다고 보았다. 성경비평학이 독일 경건주의의 본산인 할례대학의 한교수인,셈러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그 또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동정녀 탄생, 예수의 부활, 마귀의 실존,예수의 신성, 삼위일체 교리 등도 이성에 합하지 않으므로 거부했다. 헤겔적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고 생각한다.인간예수를 강조하여. 예수는 신성이 충만한 사람으로써 모범적인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슐라이 마허) 따라서 자유주의의 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마침내 유토피아, 즉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 이상이 무너지면서, 칼 바르트는 인간의 모든 학문위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계시에 주목하고 인간문화위에 계신 그분에 음성을 먼저 들어야 한다는 "말씀의 신학"을 전하였고, 신학은 교회의 학문이라고 하며 인간의 이성에 종속되어가는 신학을 그 자리에서 건져내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신학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방법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윤치호는 유교,성리학이 성인군자되는 도리이지만 그 도리를 실천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위선으로 빠지기 쉬운데, 기독교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서 선한구원의 도리를 실천할 수가 있다고 보았고, 이것이 기독교가 우월한 종교라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대략 정리해보았다.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거나 부정 왜곡하거나 억압하면 도덕철학이나 종교간 화해, 다원주의로 빠지기 쉽다. 성령이 빠진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 도덕철학이 될는지 모르나 생명력있는 구원의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강조한다면 영분별또한 강조하여서, 거룩하지 않고 세속의 탐욕을 그대로 살려나가려는 가짜 성령의 역사 또한 분별해 내야 한다. 여기에서 죤 웨슬리의 "성화"의 교리가 중요한 안내자 역활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