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김정효
  • 2497
  • 2020-01-31 16:51:45
[조선일보 100년] 종교 탄압하던 김일성, 뒤에선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 아멘"하더래요

[백선엽과 김형석, 文武 100년의 대화] [3·끝] 아이젠하워, 정일권, 한미상호방위조약
白 "김일성, 만주군관학교 출신 포섭하려 정일권 등에 접근"
金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 맡아 운영하던 중 北압박에 월남"

白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만나 한미방위조약 필요성 설득"
金 "미국보다 중국에 기우는 文정부, 어리석었다는 평가받을 것"

숭실대학(지금의 숭실대학교) 7대 학장을 지낸 고(故) 김성락 목사는 생전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자신의 방북 스토리를 들려주곤 했다. 김 목사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평양 숭실중 동문이었고, 함께 교회를 다닌 주일학교 친구였다. 이런 인연으로 김 목사는 1980년대 초반 두 차례 김일성의 초청을 받았다.

"한번은 김일성이 함경도에 있는 별장으로 김 목사님을 모셨데요. 점심 시간이 되자 김일성이 '목사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니, 기도가 끝나자 '아멘' 하더래요. 목사님은 헤어질 때 성경책 한 권을 선물로 주고 왔다고 하데요."

지난해 11월 중순 본지 신년 특별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만난 백선엽(왼쪽) 장군과 김형석 교수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순 본지 신년 특별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를 위해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만난 백선엽(왼쪽) 장군과 김형석 교수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해방 직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 땅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고, 기독교 등 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던 김일성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었고, 자신 또한 기독교 신자였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이름 반석은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한글로 옮긴 것이다. 김 교수는 "자기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종교를 가진 주민들은 잔인하게 억압하는 김일성의 모습은 북한 체제가 얼마나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모순 덩어리인지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본지 특별기획 '文武, 100년의 대화'의 두 주인공 백선엽 장군과 김형석 교수는 1920년생 동갑내기로 해방 이후 김일성 정권이 북한을 장악하면서 남한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북한에 계속 남았더라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장군은 1945년 12월 말, 김 교수는 1947년 여름에 월남했다.

―20대 젊은 나이였다. 남한으로 오겠다는 생각을 왜 하게 됐나.

김―그곳에선 살 수가 없었다. 일제 때 함석헌 선생이 하던 학교를 해방 후 내가 이어받았다. 북한 공산당 정권이 본색을 드러내면서 학교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학교 재정을 책임졌던 아버지 친구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공산당 간부였던 제자 중 한 명이 밤중에 찾아와 "선생님 학교가 사상이 제일 안 좋다고 찍혔다"며 빨리 피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고향을 등지게 됐다.

백―초기에 김일성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포섭하려 했다. 정일권·김백일 등에게 접근해 "함께 나라를 건설하자"고 했다. 만주군관학교 4년 선배인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상의했다. 그때 "김일성은 처음에 우릴 이용한 뒤, 결국은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1945년 12월 중순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고, 우린 서둘러 북한을 빠져나와야 했다.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가.

김―이번 세기에 벌어질 가장 큰 사건을 꼽으라면 공산주의의 멸종일 것이다.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들은 전 세계를 점령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역사에선 그 반대로 공산주의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중국 공산당도 북한 정권도 그 운명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백―향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국가들은 살아남겠지만, 공산주의는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또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정치 지도자가 있는 국가는 살아남고, 사리사욕에 눈먼 지도자를 선택한 국가는 도태될 것이다.

백 장군은 한·미 동맹의 상징적 인물이다. 6·25 전쟁 때 미군과 함께 북한군·중공군과 맞서 싸웠고 전쟁 후에는 미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국군 전력증강·현대화 작업을 벌였다. 미군은 지금도 백 장군을 "우리 모두의 영웅"이라고 부른다. 1953년 5월 미국 방문 당시 6·25 전쟁 때 전우 알레이 버크 제독의 조언을 받아 일정에 없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사시킨 뒤,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나도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했고, 한·미는 1954년 역사적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백―미국은 6·25 전쟁 때 함께 피를 흘린 너무나 소중한 동맹이다. 우리는 미국과 동맹을 "포에버(forever), 포에버, 포에버" 갖고 가야 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만이 우리의 소중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함께 지킬 수 있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김―뉴질랜드에선 유능한 사람은 호주로 간다. 호주에선 유능한 사람이 캐나다나 영국으로 가고, 캐나다에선 또 미국으로 간다.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많은 사회는 편하게 살 수는 있지만 국가 발전이란 면에선 자유민주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경쟁이 심한 시기에는 선의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데, 이때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과 독일 등 글로벌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백―지금의 상황이 6·25 전쟁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정말 걱정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여전히 공산·사회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북한은 여전히 남한을 적화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우린 개방적인 해양의 문명권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이하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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