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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 걸음 걸음
도현종
- 1303
- 2020-02-19 21:46:54
여태후(呂太后)는 유방이 건달 생활과 방황으로 미천할 때 불법적으로 맞이한 부인으로 아들 혜제(惠帝, 유영)와 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은 부인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태후는 자신의 소생인 유영(劉盈)을 비롯해 유방(劉邦)의 비빈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 여덟을 모두 공포에 떨게 한 권력에 매몰된 독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유방에게는 이미 조희(曺嬉)라는 여인 사이에 태어난 첫째 아들 유비(劉肥)가 있었다.
유방의 신분상승을 위해 여치가 만들어낸 이야기 중 하나는 유방이 깊은 산속에 숨어있어도 번번이 여치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는데, “유방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서기(瑞氣)가 떠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고, 이 전설은 곧 유방을 하늘에서 점지한 황제라는 거짓 신분 세탁의 정설로 퍼진다. 장기간 전란 속에서 고생해온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매혹될 만한 일이다.
유방이 한나라의 황제가 된 지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태자 유영이 등극하게 되니 이가 바로 혜제였다.
이때부터 여후는 태후(太后)가 되어 자신의 권력을 만들어 나갔다. 첫째. 유방의 총애를 받았던 척부인을 궁녀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가둬두는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조(趙)왕으로 나가있던 여의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입궁케 하여 혜제가 없는 틈을 타 독살한다. 여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척부인의 손과 발을 모두 자르고 눈알을 뽑아 장님을 만들고, 귀에는 뜨거운 유황을 부어 귀머거리를 만든 뒤, 약을 먹여 벙어리를 만들었다. 그런 참혹한 일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몸뚱이만 남은 척부인을 돼지우리에 던져놓고 ‘인간돼지(人彘)’라고 부르도록 했다.
여태후는 아들 혜제에게 인간돼지를 보여주었다. 혜제는 꿈틀거리는 돼지가 척부인임을 알자 대성통곡하였고, 그날로 병이 들어 1년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혜제는 사람을 보내 여태후에게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여후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없습니다(此非人所爲. 臣爲太后子, 終不能治天下).”라고 전했다. 이후 혜제는 종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병들어 보위에 오른 지 7년 만에 죽는다. 혜제의 보위기간 7년 그리고 혜제 이후 여태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 도합 15년 동안 한나라는 여태후의 여인천하가 지속된다.
자신의 친아들 혜제에게 그 참혹한 장면을 숨기지 않고 일부러 보여준 까닭은 무엇일까? 어머니 여태후는 자신의 아들 혜제가 자혜롭긴 하지만 심신이 허약하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대목을 다르게 본다면 여태후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참혹한 광경을 아들에게 보여주어 충격에 빠진 나머지 아들 혜제가 1년 동안 병석에 몸져눕게 했다. 그도 모자라 결국 아들에게 일종의 정치포기각서 “인간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여후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없습니다.”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참으로 악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유방의 후손이 제후로 있는 나라에는 여씨 집안의 딸들을 제멋대로 정략결혼시켰다. 그중 가장 황당한 일은 자신의 딸 노원공주와 조왕 장오(張敖) 사이에 태어난 딸을 자신의 아들 혜제와 혼인시키고 황후로 만든 일이다. 이것은 여태후가 유씨천하를 잠식하기 위해 철저한 기획을 세웠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황후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황후는 거짓으로 임신한 척하여 혜제와 합궁하여 태어난 궁녀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했는데 그가 바로 유공(劉恭) 소제(少帝)로 제위에 오른다. 여태후는 그 아이의 어미를 살려두면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살해했다. 세월이 흘러 소제가 이 사실을 알았다는 소식을 듣고 여태후는 변란을 걱정하여 소제를 남모르게 죽였다.
유방의 다른 부인 소생인 유회(劉恢), 유우(劉友)를 죽이고 유건(劉建)의 후사도 끊어 봉읍을 없앴다. 남편의 소생을 그렇게 무참하게 처단하고 공포에 떨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漢)나라를 세우는 데 무장으로서 공훈을 따진다면 서열 1,2등이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여태후는 이들이 역적으로 몰려 적소(謫所)로 유배 가는 것을 장안으로 끌고 와 참수했다.
결국 여태후 사망이후 진평과 주발에 의하여 유방의 자손들과 함께 여씨 일족은 처단을 당하게된다. 여씨 집안이 군과 조정을 장악했지만 뿌리가 없고 정의롭지 못한 권력은 하루아침에 망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태후는 본기에 오를 만한 사람이 아닌데, 사마천 같이 탁월한 사관을 가진 역사가가 그런 오류를 범할 이유가 없다. 여태후를 열전보다는 본기에 실어 그 잔악함과 횡포를 좀 더 적나라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경계(警戒)가 되도록 기록한것이다.
감리교회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지면 악녀 여태후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