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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얻는 것인가(눅 10:25-28)
최세창
- 2346
- 2020-02-22 03:57:28
“율법사”(노미코스, νομικός)는 5:17의 “교법사”의 주석을 보라.
“일어나”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시험하여 가로되”에 “함축된 것은 인정받는 종교 지도자가 비공식적인 스승에게 올바로 대답을 주는지 보려고 시험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를 시험한다’는 식의 지나친 해석은 타당치 않다고 하겠다”(I. H. Marshall. 참조: E. H. Plumptre).①
“선생님”(디다스칼레, διδάσκαλε)은 2:46의 주석을 보라.
“영생”은 조엔 아이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으로서 ‘영원한 생명’이다. 이 영생은 멸망(갈 6:8)과 죽음(롬 6:22)의 반대가 되는 생명이다. 사도 요한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4. 참조: 요일 5:12)라고 하였고,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하였다. 즉, 영생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사이며, 그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 역시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라고 하였다. 영생이란 그 명칭이 지시하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 곧 결코 끝나지 않는 생명이다.
물론, 이 영생 또는 {생명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덕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βίος κατ’ ἀρετήν)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신비적 실체로서의 불멸은 결코 아니다.}(요 1:4의 주석).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율법사가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율법사인 그는 율법에 근거된 영생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 12:2에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하였고, 마카비 II 7:9에는 “세상의 왕이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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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교: H. Seesemann, TDNT, Vol., VI, 28,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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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일으켜,…영원한 삶을 얻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이해한 영생이란 죽은 후에 부활하여 천국(메시아 왕국)에서 영원토록 누릴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질문의 요지는 세상 끝 날에 무엇을 해야 구원 곧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함이다.
{레인(W. L. Lane)은 “그의 질문 형식은 인간이 하나님의 선물인 천국 또는 영생을 무력한 상태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성취의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질문의 배경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117)는 “묵시문학과 함께 비로소 유다교에 퍼진 부활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구원 곧 영생을 보증하지 않고, 개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적 결단과 실행에 맞서도록 촉구하였다.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욕을 갖게 되면 행해야 할 율법에 주목하게 되고, 율법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쿰란 종파에서 확실한 구원(영생)의 길로 간주되었던 엄격한 토라주의(율법주의)에 이르기까지 토라에 대한 다양한 해설들은 이 나라의 적지 않은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혼란을 빚도록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질문에는 율법주의의 근본적인 잘못이 드러났다. 즉, 구원(영생)은 무엇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영생)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막 10:17의 주석).
그 율법사의 시험하는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서, 누가는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질문하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율법 곧 구약성경에 관심을 갖게 하셨다. 질문의 요지는 그 문제에 대한 율법의 내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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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에 대한 해석이다.
율법사의 대답에 대해, 누가는 【27】“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는 신명기 6:5(참조: 신 11:13)을 인용한 것으로, 십계명의 첫 부분인 하나님께 대한 계명들의 요약이다.
“네 마음을 다하며”의 “마음”은 1:51의 주석을 보라.
“목숨을 다하며”의 “목숨”(프쉬케스, ψυχής)은 1:46의 “영혼”의 주석을 보라.
“힘을 다하며”의 “힘”(이스퀴오스, ἰσχύος)은 3:16의 “능력 많으신 이”의 주석을 보라.
“뜻을 다하여”의 “뜻”은 디아노이아스(διανοίας)이며 ‘사상’, ‘목적’, ‘지성’, ‘사고력’, ‘생각’, ‘기질’ 등을 의미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의 “사랑하고”(아가페세이스, ἀγαπήσεις)는 6:27의 주석을 보라.
결국 위의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으로 목숨을 얻었고, 그 사랑을 힘입어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의 일부분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인간의 전 존재를 쏟아 붓는 것이어야만 한다. 삶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일관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일환으로서 자연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사랑,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섭리의 대상인 자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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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으로, 십계명의 둘째 부분인 인간에 대한 계명들의 요약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일환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점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한다고 하면, 그에게는 그 밖의 어느 누구도, 어떤 것도 사랑할 여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로도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요한일서 5:2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②라고 하였다. 또, 4:20-21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③라고 하였다.
레위기 19:18에는 “이웃”을 동포와 동일시하였다. 이웃은 바로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바리새인들]은 이 말에서 다른 보통의 사람들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쿰란 종파의 사람들은 ‘어둠의 자식들’(1QS 1:10, 9:21-22)을 제외시켰다.…유다교인들은 이 범주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외국 사람들을 제외시켰다”( I. H. Marshall).
{웨셀(W. W. Wessel)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웃(동포)이라는 말을 구약성경의 구절에서보다 더 좁게 해석하였다. 즉, 구약성경( 레 19:34 등)에서는 함께 사는 타국인도 포함했으나, 그들은 유대인과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만 포함시켰다.”라고 하였다.}(막 12:31의 주석).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포함하여(마 5:43-48) 도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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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의 요한일서 5:2의 주석을 보라.
3) 저자의 요한일서 4:20-21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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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베푸는 사람 사이를 이웃 관계로 새롭게 해석하셨다(10: 29-37). 그렇다고 하면, 결국 이웃이란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할 때에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한 것에 대해, {스탐(R. T. Stamm)은 “이웃을 자신보다 덜 사랑하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면 이웃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웃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할 때는 자만도 거짓도 겸손도 아니라, 올바르게 자신을 평가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갈 5:14의 주석).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예수님의 구속의 대상인 우리와 똑같은 존재로 여겨 사랑해야만 한다.
율법사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누가는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 율법사가 율법의 계명으로 대답한 것을 옳다고 인정하셨다. 그리고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명하셨다. “율법이란 알고 암송하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여야 되는 것이다(마 7: 21, 24 등)”(이상근).
예수님에게 있어서 영생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
출처: 최세창, 누가복음(서울: 글벗사, 2003, 1판 1쇄), pp. 438-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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