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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에 대한 모 신학 박사들의 견해에 대해
현종서
- 2274
- 2020-02-21 12:17:20
성서비평학적인 관점에서? 동성애 문제를 살펴 본다는 face 북에서 허박사와 이박사의 동성애에 대한 견해를 보면서
이박사가 허박사가 쓴 글을 소개하면서
1.허박사의 견해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파괴의 으뜸 죄인가?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라하는데 인간의 자연파괴의 죄가 창조질서를 깨뜨리는 더 큰 죄이다. 이것 지적못하는 이들이 동성애 문제까지고 창조질서 어그러 뜨린다고 발벗고 나서는데,이것 지적하기 전에 자연파괴의 죄를 먼저 회개하라. 그방면에 침묵하며 이런 것 가지고 논하고 정죄하는 것은 위선의 죄일 수 있다.
2.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인 완전창조가 아니라 계속 창조되어가는 것이다.
뚜렸한 남성과 뚜렸한 여성 사이에 간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헤라이 클라이토스- 만물은 변화하는 존재, 현대 과정철학에 근거한 과정 신학이 있다. 신학자중에는 창조와 진화를 조화해 보려 한 이들이 있다.
이박사는 Beyerhaus 박사의 이론, 이정훈 교수의 반론을 소개하면서도 허박사 이론을 변호하고자 한다. 자연질서에 순응않고, 안경쓰는 것,각종 옷치장, 자동차,배,비행기 만들어 타고 가는 것,마이크,-이것도 자연스러운 것 아니고 인위적인 것 아니냐? 창조질서를 그대로 놔누거나 따르지 않고 않고 가공한 것, 인위적인 것-창조질서 위배,거역하는 행위를 하는 것,동성애는 자연질서안에서 일부 변형된 것일 뿐이다.
그것을 긍정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그대로 두라,-표준이 없다. 땅을 충만하라는 말속에 동성애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인 현상으로 인정할 수 없을까? (젠더 이론대로) 독특한 삶 그대로 (남장 여인, 여장 남자) 인정하자.창조질서로 이런 현상을 빈난하며 제어 할 수 없다는 것(이박사 이론)
나는 이분들과의 의견이 틀리다고 친분까지 깨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분들과 다른 나의 의견도 개진하고 싶고 평신도들을 위해 몇마디 하고 싶다. 그리고 건전한 토론 문화를 바란다.
비평-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한다는 뜻의 초점은 다른 데 있다.창조해 놓고 그대로 있으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특별히 인간에게는 번성하여 세상을 다스리라 하였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이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는 데 그 촛점이 있다. 간성이나 동성애 관계만으로는 번성을 이룰 수가 없다.
진화론과 유물론과 성경본문에 대한 역사비평적 접근에 대해
창조론과 유신론이 진화론과 유물론의 반대 사상이며, 성경읽는데 역사비평학적 접근의 문제점이무엇이길래 보수적 신학자들이 왜 경계하며 싫어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방법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 내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진화론과 유물론은 같은 근원 무신론에서 출발한다. 무신론을 말하니 인간이 주인이되어 스스로 기준도 만들 수 있고 자기가 법을 만들기도 하고 그 법의 집행자가 될 수도 있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사상인 듯 보인다.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라는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 그런의미에서 이러한 세계관과 가치관의 불교는 최고의 인본주의적인 종교요 철학이라고도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하나님 없는 최고의 실존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말틴 부버에 의하면 붓다(부처)의 문제는 나와 너의 대화의 존재인 인간을 ‘나와 너와의 대화’의 존재를 넘어 ‘영원한 너와의 대화’를 가르치지 않고 ‘그 영원한 너’를 알리지 않고 자기에게만 집중하게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 또는 기독교의 신학은 성서가 그 알파와 오메가이다. 성경의 맨 처음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분이 만물을 만드셨다고 말씀한다. 그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를 만드셨고 그 모든 세계를 주관하시면 또 심판하신다고 한다. 성경을 어떤 편견없이 읽으면 독자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준다. 성경은 글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을 만한 글로 씌여져 있다고 보고 있다. 무슨 특별한 신비체험이나 고도의 지식을 가져야 비로서 알게 되는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그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그 내용을 더 깊이있게 이해 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또는 장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속의 하나님은 누구나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영적세계에 대한 무지로 그러한 세계까지 포함한 진리를 도저히 깨달을 수 없기도 한다. 3차원 과학 지식으로 4차원 진리를 알겠는가? 의미의 세계를 물리적 과학적 탐구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남녀 노소 유무식을 막론하고 모든 인종을 초월해서 인간에게 주시는 말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기에 하나님과의 대화의 통로가 어딘가에 있는 것, , 하나님앞에서 자기가 죄인됨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게 될때 통로가 열린다. 그런데 계시의 진리란 가르쳐 주시는 이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특수통로(깨어난 영)를 통해 알려 줄 수 있고 인간이 자기방법으로 노력해도 도저히 알 수 없을 수 도 있다. 계시는 우리가 받는 것이지 내가 탐구해서 아는게 아니다.
문예부흥시기에 인간의 이성 및 감성과 오성 그리고 인간의 문화적 창조의 성품을 최대한 긍정하고 그대로 따른다면 인류 사회속에 유토피아도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세계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그 환상이 깨졌다. 인간은 그 합리적인 사고의 열매로 유토피아만 이루는 게 아니라, 전쟁과 지옥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다시금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고, 여기서 다시 하나님(신) 과 그의 계시에 대해 주목을 하게 된 것이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성경의 계시대로 인간은 죄로인해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유전된 죄, 또는 현상적인 죄성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유전죄나 회개라는 말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현상적인 죄의 모습(불신, 반목, 나태, 교만,거짓)을 버리고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인간이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인간이성을 최고의 기준으로 생각하는(철학자들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고속에는 여전히 성경의 계시 보다는 자신의 합리적인 이성을 신뢰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병든 자에게는 정상적인 음식이 싫게 느껴지고 비위에 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병이 나으면 정상적인 음식의 맛을 바로 알고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성경은 일반 합리적인 이성만을 가지고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을 읽으려면 “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니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화론적인 현상은 분명히 생물현상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빗대어 상상의 날개를 펼쳐 종을 뛰어넘는 대진화를 말하니까 문제인 것이다. 그런 상상이 DNA 발견으로 입다물게 되었어도 미련을 봇 버리고 있다.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으나 인간이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신이되려 하거나 짐승이 되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지은 절대자가 따로 계시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자기 보다 못한 생물들에 대해서는 청지기적인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법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청지기 입장에서의 법이지 창조자 입장에서의 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단 여기에서 끝내고 앞으로 기회가 되면 더 깊은 논쟁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지식과 지혜는 많은 편견을 생산해 내고 하나님의 진의를 오히려 못 깨닫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차라리 순진한 어린이에게 참 진리를 근본적으로 깨 닫게 해 주는 경우가 있었다. 바르트의 신학하는 방법가운데 기도와 성경읽기를 꼭 집어 넣었는 데, 현금의 신학자들은 이런일 보다 많은 다른 유식자의 글을 읽으며 그것을 이해 하노라 시간과 정력을 다 낭비하는 경우가 많은듯 보인다. 그렇게 그네들의 난해하고 특이한 의견을 이해하노라고 진을 빼고 정작 가까운데서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진리를 오히려 더디게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