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그날의 기록

이주익
  • 2414
  • 2020-02-28 02:12:25
삼일운동, 그날의 기록

삼일 독립 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사에 우뚝 선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시작된 이 운동은, 민족혼에 불을 당기며 맨주먹으로 목숨을 걸고 항거한 우리 민족의 의거로 불 타 올랐다.

단일 민족의 단합된 대 항거로 전 민족이 참여했던 것만큼 그 피해도 엄청났다. 이 운동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상해에 임시 독립 정부를 수립하게 했고, 이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이 땅에 건국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이 위대한 삼일운동의 역사가 한국 감리교회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과, 은폐되었던 사건들이 최근 문헌을 통하여 속속 밝혀지고 있다.

지금껏 묻혀있었던 이 진실된 사실들은 정동제일교회 역사편찬위원회와 탁사학회에서, 당시 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록과 문헌을 수집하고 정리한 결과로 보아 진다.

이번에 수집되어 정리된 문건은 아펜젤러 문건(1884년-1902년, 전 12권 사진 500 여 점), 탁사 최병헌 목사 문건(저작, 설교집 약사 등 20여 점 외 확인된 탁사 문고 2,000여 권)을 중심으로, 노블 문건(1892년-1956년, 전 10권 사진 30여 점), 현순 문건(1903년-1968년, 전 22권)으로 그 간 이 문건은 대부분 영어로 쓰여져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을 현순 문건의 경우 지난 1999년 유일한 생존자인 아들 데이빗 현이 서울연회(당시 박춘화 감독)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됨으로 감리회 본부에 전달되었고, 아펜젤러 문건 또한 현 감독회장이신 장광영 감독과 당시 배재대 교목실장이셨던 조성환 목사의 수고로 문건정리 일체가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직계 후손들을 만나게 됨으로 아펜젤러 선교사가 찍은 귀한 사진들과 미공개된 2권의 문건이 새롭게 입수되었고, 놀라운 것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1902년 순직한 이후 그 뒤를 이어 42년간 정동구역회를 맡아 일했던 윌리엄 아더 노블 감리사의 부인 마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Mattie Wilcox Noble, 당시 정동 그레이하우스 관장)의 일기와, 그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이 아펜젤러 2세의 딸이자 노블 선교사의 외손녀인 마가렛 하일러에 의해서 지난 1월 전달된 것이다.

마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의 일기(문건 4권 51p-81p)와 현순 목사의 자사(自史) 부분을 중심으로 삼일 독립운동의 진상을 살펴보면, 삼일 독립운동은 고종의 밀사 하란사 여사가 제2 왕자 이강공 의친왕과 함께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의 안내로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단동에서 발각, 미수에 그치게 되자 왕비의 숙부로 당시 최고 권력자인 찬시(贊侍 : 이왕직 관리자) 윤덕영이 내시 호상학을 교사, 고종 황제를 죽이게 된 것이 원인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블 박사의 부인은 당시 가족과 함께 감리회 한국 선교부의 책임자로 정동, 특히 덕수궁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쪽대문이 있었다고 함) 거주하고 있었으며, 초기 평양 선교사 재직 시는 홀 병원 책임자로, 정동에 있을 시는 정동교회와 이화학당 운영 책임자로 있었다. 당시 이화학당 부 학당장 하란사는 이강공과 미국 유학을 다녀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마티 부인과 한집에 살았다.

1918년 1차대전 종료 소식과 소수민족 자결에 의한 독립원칙이 전해지자 고종은 손정도, 하란사, 이강공, 의친 왕으로 하여금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동제일교회 담임 손정도 목사는 갑자기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 부인을 홀 병원에서 일하게 하고 어머니 오신도 여사(애국부인회 회장)의 도움으로 이강공과 하란사의 국가 탈출로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은 사전에 탄로되어 두 사람(이강공 의친왕, 하란사)은 중국 단동(斷東)에서 일경(日警)에 잡혀 돌아오게 되며, 이후 이강공은 연금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왕실에서는 윤덕영(尹德榮)에 의해 불시에 왕세자(이은)와 이방자의 정략결혼이 일본 동경에서 거행되도록 함으로 왕(순종)을 비롯한 모든 고관들은 일본으로 보내지게 된다.

1월 21일 고종 황제께서 “그날 저녁까지 상(上)께서는 보행을 하셨다.”는데 “야심한 시각 피를 쏟고 붕어(崩御)하셨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각처에서 의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손정도 목사는 평양 홀 병원에서 이승훈 선생을 입원시킨 가운데 서북파 인사를 통해 삼일 독립운동의 기본 틀을 짜게 한다.(감리회 대표 5인 소개함)

직후, 홀 병원에서 퇴원한 서북파의 거두 이승훈 선생은 서울로 와, 제중원 약제국에서 감리회 측 인사를 만난 후 정동교회 현순 목사를 대동, 손병희 선생 측 기호파 인사로부터 자금을 수수 받고(거사금과 상해정부 수립금) 현순 목사를 손정도 목사에 이어 상해로 보내게 된다.

그 후, 상해 정부에 금 1만 불이 송금됨으로 손정도 목사(당시 의정원원장)가 찾아, 현순 목사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 운영자금으로 쓰여지게 한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삼일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저질러진 일제의 가장 처참한 만행인 제암리 사건에 관한 것이다.

현재까지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 군경이 3월 15일 감리교회 만세 시위자의 마을인 제암리교회를 불사르고 23명을 살상한 데 이어 천도교 시위 주동자 마을인 고주리에서 6명을 총살하는 등 29명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문건에 의하면 그 이전 사강리에서 39명이 총살되었고 326채의 가옥이 불타 1,600명의 이재민이 발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이어 16개 마을에서 학살이 자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원 지방 내 또 다른 5개 처 교회가 같은 화를 당했다는 것이다.

노블 감리사(부인)의 현장 기록에 의하면 “또 다른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지역에서만도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하였다.”고 했고 “또 다른 마을의 어떤 여자는 교회 교인 중 총에 맞거나 타죽은 사람 11명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이 같은 만행은 제암리에서 약 20리 떨어진 아찬(Achan) 마을에서였다.” “살해당한 우리 교단(감리교) 목사의 아들을 보았는데 그는 핏발 선 눈에 머리를 산발(散髮)하고....”

이 사건의 기록은 4월 15일의 제암리 만행이 확대되어 4월 19일 전후 16개 마을 5개 교회에서 더 큰 만행이 자행되었다는 것과, 이 엄청난 사건의 현장을 영국과 미국 공사가 방문했고 하세가와 총독은 노블 감리사에게 전소(全燒)한 3개 교회에 대해서, 한 교회당 재건축비 5백엔을 지급하는 대신 이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으며, 16개 마을에서 5개 처의 감리교회가 전소됐고 불탄 집, 한 집당 50엔씩을 주겠다고 하나, 가장 싼 집이라도 재건축하는데 250엔이 들고 쓸만한 집은 1천 엔이 들어간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은 축소 은폐되어 역사에 묻혀 버린 것으로 생각 된다.

노블 감리사는 “이후에도 이들은 불시 검문을 통해 성경이나 찬송가를 발견하면 즉시 경찰서로 끌고 가 그중 한 사람(홍 씨)이 죽어 5월 15일 현지에 내려가 장례를 치루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어 3.1 만세운동을 보는 일제의 시각 즉 3.1 운동은 감리교회가 일으킨 독립운동임을 시사하고 있다.

감리회 수원지방을 중심으로 한 3.1 만세운동은, 대학살 사건으로 독립혁명과도 같은 차원에서 재조사되고 규명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 된다.

이 육필의 주인인 노블 감리사(부인)는 한국 감리교회의 핵심인 정동구역회를 관장하는 감리사로 42년간 한국 감리교회를 지킨 분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아들 하워드 노블은 해방 직후 맥아더 사령부의 최고위 정보 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소련의 전면 남침을 38선에서 막은 최고의 공로자라고 한다.

이는 U.N.군의 참전에 앞서 미 극동군이 무조건 개입되도록 맥아더를 설득시킨 분이기 때문이다.

주후 2001년, 새천년이 시작되는 해 삼일절을 맞아 일부나마 우리 감리교회가 가진 이 위대한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바로 내놓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이 일은 장광영 감독회장이 2년 전 탁사학회를 설립, 조성환 목사로 하여금 아펜젤러 문건을 정리하시고 현순 문건을 한국으로 오게 한 것이 계기가 된 것임을 밝혀 드린다.

이 책이 출판되기까지 미국 현지 여러 곳을 다니며 본 문건들을 수집한 정동제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위원 김대구 권사와 번역을 맡아준 키네론 연합감리교회 장학범 목사, 연합감리교회 세계 선교부 김홍덕 목사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끝으로, 우리 기독교 대한감리회가 앞장서 발굴한 문건들은 앞으로 국사편찬위원회 등 정부와 학계에서도 관심을 가져 더욱 정리되고 연구됨으로 한국 근대사가 진실되게 바로 잡히게 되기를 바란다. - 펴낸이의 글 -

주후 2001년 3월 1일

서울연회 본부 총무

이전 도현종 2020-02-27 어른되기 쉽지않다
다음 최세창 2020-02-28 코로나19까지 겹친 조국이 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