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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의사
도현종
- 1240
- 2020-03-09 04:04:17
친일파 후손이 독립운동가에게 편지를 썼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런 편지는 본 적이없다.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써내려간 충절의 서신은 분명 존재한다.
春來不似春의 어려운 시절에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을 기억한다.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찌든 조선의 유학자들은 을파소를, 을지문덕을, 양만춘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조선왕조실록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일제가 그 빈틈을 놓칠 리 없다.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조선은 옛날부터 중국의 식민지였다”며, 침략이 정당하다는 해괴한 논리를 폈다.
역사 왜곡의 범죄는 일제가 저지른 것이지만, 조선왕조가 길을 열어준다. 민족 혼이 말살되는악조건에서, 대몽항전을 70년이나 지속한 이 땅의 주인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고려보다 더 퇴보한 조선에서 신음하던 백성들도 국난 때마다 떨쳐 일어나 이땅을 지켜내었다.
여성의 신분으로 활동이제약시되던 시절에 윤희순은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을미사변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일제는 단발령을 발표해 강제 시행한다. 이때 윤희순은 최초의 한글 의병가인 <안사람 의병가>와 <병정가> 등 여러 노래를 창작하고 의병들에게 보급해 사기를 증진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한다. 또한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제목의 경고문으로 일제를 꾸짖었고, 일제의 억압과 폭력에 조선의 여성들도 맞서 싸울 것을 천명한다
8편의 의병가는 최초의 한글 의병가이자 민족 저항 시가로 평가받는다.
윤희순은 여자 의병 30여 명을 모집해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 남장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거나 전투에 참여하는 의병들을 뒷바라지해주는 등 의병 군의 든든한 후방지원이 되어주었다.
노학당(勞學堂)을 창립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노학당마저 폐교되자 윤희순은 무순(撫順)으로 이주하여 조선독립단을 만들었고, 1926년에는 조선독립단 가족부대,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한다.
윤희순 의사는 독립투쟁 전선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그러나 윤희순 의사에 대한 평가나 예우는 고향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 그의 동상은 주차장에 외로이 서 있다. 정부의 독립유공 포상 역시 5등급 가운데 제일 낮은 5등급(애족장)에 그치고 있다. 여성 독립유공자 가운데 윤희순 의사만큼 얘깃거리가 많은 분도 드물다. 유관순 열사보다 더 윗자리에 갈만한 분이라고 생각되는데 제대로 챙기는 사람이 없다.
이 역사가 슬픈 우리의 역사이다.
역사는 힘과 숫자로 세위짐이 아니다. 다윗은 사단에게 속아 격동하고(역대상21:1)지신의 세력을 계수하려 하다가 민족적인 위기를 맞게된다. 이일로 7만 명이 죽는다.(역대상 21 :14)
우리의 살길은 힘과 세력의 자랑이 아니라 예수 운동이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주님만이 살아내야 할 길임을 보여준다.
여성 최초의 의병장은 윤희순 의사이다.
우리는 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