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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드】우승화관(優勝花冠)
함창석
- 1784
- 2020-03-22 17:13:41
優勝花冠
시인/ 함창석 장로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고 유대인의 왕이여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원래는 화려한 색상의 수건이나 끈으로 엮고 주변에 각종 보석들로 장식한 아름다운 관을 가리킨다. 왕이나 귀족 등 지체 높은 자들이나 상류층 귀부인들이 사용하였다. 보통 ‘관’으로도 번역되는데, ‘왕관’, ‘면류관’, 대제사장의 관, 여인이 단장할 때 쓰던 관 등을 가리킨다.
관모로 신라 문무왕 때 중국의 복식이 들어오면서 함께 전래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귀족과 양반계급의 부녀자 예복에 쓰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크기가 작아져 머리에 쓰는 관모라기보다는 미적 장식품으로 얹는 수식이 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부녀자의 머리모양이었던 가체가 사치로 인한 폐가 많기로 영조와 정조대에 걸쳐 이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게 함으로써 그 사용이 일반화되었으나 가체의 사치는 다시 화관이나 족두리를 주옥금패로 장식함으로써 그에 따른 폐가 심하였다.
화관에는 칠보로 장식한 칠보화관과 구름무늬를 새겨 만든 운관이 있었다. 족두리보다 높이가 높았으며, 두꺼운 종이에 무늬를 새기고 검정 칠을 한 뒤, 가장자리를 도채부금하고, 위를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화관 양옆에는 비녀(족두리 비녀)를 꽂게 되어 있었다.
품계를 구분하는 것이었으나 가체를 금하고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도록 권장한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서민들도 혼례 때에는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 정장할 때에는 족두리를 쓰고, 화려하게 꾸밀 때에는 화관을 썼으며, 대개 활옷이나 당의를 착용할 때 썼었다.
대궐에서 일상적으로 의식이나 경사가 있을 때, 양반집에서는 혼례 때나 경사 때에 대례복 또는 소례복에 병용하였다. 옛날에는 궁중 내연에서 기녀 ·동기 ·무녀 ·여령들이 썼으며, 모양이 약간씩 달랐는데, 대체로 5색 구슬로 장식하고 날고 있는 나비 모양의 장식을 달았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니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시대가 도래를 하면 누리게 될 참된 기쁨을 예언하면서 슬픔으로 머리에 재를 쓴 자들도 화관을 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한편 종려나무나 월계수 가지로 만든 면류관은 고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용사나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자들에게 수여되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