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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예배(3. 22 주일낮 설교요약)
오세영
- 2183
- 2020-03-24 06:46:56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예배를 몇 주간이나 드리지 못하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당황해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불신앙은 아닌지 그리고 행정명령에 의한 예배금지 조치 등의 강수가 지자체 마다 발동되고 있어 종교탄압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벌어지는 현상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탕 하나 때문에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일억 짜리 수표 때문에 싸우지는 않습니다. 요즘 마치 이와 같은 현상이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투명한 현대인들은 중세시대에 흑사병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예배하며 기도하던 어리석음을 보이진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의 특수성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에서 쉽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사회적 염려가 마치 우리가 신천지의 무모함을 보며 탄식하던 것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때 주님은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 때이며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즉 예배는 장소주의(localism) 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나 산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남 유다는 예루살렘이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이 모리아산이라고 주장하며 그곳에 BC323년경 성전을 짓고
200여 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과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루살렘이 되었든 그리심산이 되었든 장소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으로 예배하라는 것은 어디서라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으로 예배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무엇은 영으로 라는 것이 답입니다.
또한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형식은 예배의 내용이 아닌 형식주의(formalism) 입니다.
진리로 예배하는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여 사마리아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장소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장소주의와 형식주의가 팽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소주의와 형식주의를 벗지 못하면 예배는 반드시 예배당에서 드려야 하는 것이며 지금과 같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어려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일제시대 나 공산당에 의해 예배가 강제로 금지되는 것이 아님에도 신앙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강행하는 것이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대답은 분명 장소주의와 형식주의를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이들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롬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가 결여되어있다면 모여서 수 없이 드리는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이사야 1장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셔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배의 장소와 정한 시간에 매이는 것은 영과 진리에서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어리석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이들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결코 장소와 시간에 매이지 않습니다.
24시간 하루가 예배가 되도록 하는 것에 오직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주일을 지키며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배시간만 거룩하고자 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들은 피나 죽은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이처럼 장소와 형식이 중요한 유대교에서는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 자가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네 오른손이 범죄 하면 찍어 불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른 눈이 범죄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지체가 산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히며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혀와 입술이 산제사로 드려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위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하는 말이나 라가라 즉 욕설 등은 산제사로 드려지지 않은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우리의 혀를 비롯한 모든 지체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길은 오직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이 자아부정과 죽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까지 다 해야 합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주일에 예배를 못 드리는 것이 안타까움이 아니라 죽지 못하여 산 제물이 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한탄하며 바울처럼 탄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공자는 60세에 귀가 순해졌고 70에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어긋남이 없었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연륜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세월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처럼 인생의 연륜이 더해질수록 온전히 하나님께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믿음의 길을 온전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치 혀를 길들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오직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영적 예배자요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장소와 형식을 찾는 예배에만 전념했던 지난 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주님의 섭리가 있는지 모릅니다.
흔히 “예배에 목숨을 걸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구했던 장소와 형식의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면 그 허탄한 길에서 속히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나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내 몸을 하나님께 불태워 산제사가 되는 일에만 힘쓰십시오.
거기에 참된 예배가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