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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일본 콜레라 재앙
이주익
- 2228
- 2020-04-07 16:37:28
은자(隱者)의 나라 조선에서, 19세기를 보내고 20세기를 맞게 된 선교사들은 1900년 워싱턴 버스데이를 기념하여 서울 정동 일원에서 신세기 퍼레이드를 벌인다.
이 세기적 행사의 주역은 아펜젤러, 언더우드, 알렌, 존스, 헐버트, 벙커, 길모어와 그 부인들이다.
첫째, 조선의 혼을 깨운 헐버트(1949년 8월 5일 서거)
1863년 1월 26일, 호머 베잘렐 헐버트
1880년, 다트머스대학에 들어가 1884년 졸업했고, 이어서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들어가 2년을 공부하고 조선에 오기 위해 여름 무렵 중퇴 했다.
동창인 길모어(George W. Gilmore),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1886년 7월 5일, 동도서기(東道西器) 개혁 시기에 조선 정부에서 영어와 신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진 근대식 관립학교로 고관 자제들이 다니는 영재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영어 교사로 초빙되어 내한했다.
7월 29일, ‘리퍼블리컨’(The Republican) 지(紙)에 기고한 “조선의 콜레라 재앙”이란 제하의 기고문은 헐버트가 조선과 관련하여 쓴 첫 글이다.
‘조선에서 있었던 금년 7월의 상황을 보자. 콜레라가 일본 선원들에 의해 부산에 전파되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서울 도성 안 인구는 15만 정도이고, 이 숫자는 도성 밖 인구와 같거나 약간 많다. 7월 15일부터 25일까지 도성 안에서만 3,140명이 죽었다. 콜레라로 희생된 사람의 시체는 죽는 당일에 모두 도성 밖으로 치워졌다. 이때 정부가 내린 유일한 조치는 시체를 내다 버릴 수 있는 두 개의 문에 관리를 파견하여 시체의 숫자를 세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3,140명은 도성 안의 숫자이며 도시 전체의 절반에 해당한다. 도성 밖 사망자 수도 도성 안 숫자와 엇비슷하다. 열흘 동안에 서울에서 콜레라로 6,280명이 죽은 것이다. 이 숫자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
'밤이면 여러 방향에서 북소리나 새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들은 콜레라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병을 가져왔다고 믿는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벌이는 각종 무속 행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이다. 이러한 조선의 현실을 안다면 어느 누구라도 아무런 도움도 못 받고 있는 조선의 병자들에게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금만 노력해서 현대적 위생 조치를 취했더라면 콜레라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일본이 근대화를 빠르게 이루었듯이 조선도 근대화를 빠르게 이루리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해본다. 조선은 이제 막 문명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문턱에 서 있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조선의 근대화 노력을 지원하고 조선인들을 격려해 줘야 한다. 특히 기독교 국가들이 앞장서서 조선을 도와야 한다.'
'조선에는 콜레라 공포 말고도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조선인들은 기근을 만나 굶주림에 시달릴 것으로 모두가 전망하고 있다. 조선의 주식인 쌀의 재고는 바닥나고 있으며, 깨끗이 씻어 먹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한 오이나 참외밖에 먹을 것이 없다. 게다가 콜레라는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만연하고 있다.’(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 헐버트 지음, 김동진 옮김, 참 좋은 친구, 2016년 7월 5일, 37-42면)
9월 23일, 개원한 육영공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고 파송된 관리들과 육영공원 절목(節目)을 만들었다.
헐버트는 유니온 신학대학 동료인 한나(May B. Hanna)와 결혼하기 위해서 1888년 9월 18일, 일시 귀국하여 뉴욕에서 결혼하고 함께 다시 내한했다.
이 땅에 온 헐버트는 1891년에, 한국인을 위해 세계 여러 나라의 환경과 정치, 학문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전용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간행해 육영공원의 교과서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동년 12월, 육영공원에서 5년 반 동안 재직 뒤 미국으로 귀환 하다.
1893년 10월 1일,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하여, 배재학당 삼문출판서(Trilingual Press) 책임자 및 볼드윈 예배소(Baldwin Chapel,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하다.
1901년 1월, 월간 영문 잡지 한국 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하고 편집인을 주관하면서 대한제국의 태동과 멸망의 역사를 함께 하게 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 이 잡지는 시사적인 문제도 취급, 일제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1905년, 종합 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Ⅰ. Ⅱ권을 출간했고, 1906년에는 문화, 풍물, 사회제도 등 조선을 집대성한 한국 최초의 한반도 통사(通史),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872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한반도 반만년 역사서는 미국은 물론 서방 세계로 하여금 한반도 역사를 이 책으로부터 시작하게 했다. 헐버트는 이 책을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와 국민들에게 헌정 했다.
헐버트는 설화 중심의 한반도 상고사(上古史)를 유민사(디아스포라)를 통해 실체화시켰다. 환웅(桓雄)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시작되는 한반도 역사, 즉 단군은 애굽의 도성 기자(箕子)에서 온 지파의 우두머리(단 지파의 이사금=임금)이며, 기록상으로 기자는 B.C. 1122년 중국 상나라에서 건너온 지파의 우두머리로 소개했다.
같은 해, 1905년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연구” 출간을 통해, 조선의 언어가 남인도 드라비다어의 언어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과 함께 가야국 사람들은 인도 가야 성에서 이주해 온 아리안 족으로 짐작된다고 기술했다.
헐버트는 역사를 글로만 쓰지 않고 몸으로 썼다. 헐버트는 조선의 외교권을 한 손에 쥐고 있던 미 오하이오(Ohio) 미션의 O.N 데니 변호사가 청(淸)나라 원세개의 불화에 못 이겨 1892년 귀국하자 그와 함께 오하이오로 가, 그곳 풋남 군사학교(Putnam Military Academy of Zonesville)에서 1년간 교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오하이오 상원의원이었던 O.N 데니와 함께 '한국 미션'을 태동시킨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모종의 한국 미션은 1901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아펜젤러가 이곳 오하이오의 헐버트를 감리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오도록 권유하는 형식으로 그 형체를 드러낸다.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걸고 1905년 10월 15일, 고종 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 일본의 배신적 행위로 야기된 을사보호조약의 무효(한국의 주권수호 호소)를 탄원하였으나, 미국의 여론을 얻는데 실패 했다.
1907년 5월~7월, 또다시 고종 황제의 특사로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한국 대표와 함께 헤이그로 가,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며 한국 대표기 본회의에 참석하여 탄원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서를 당시 러시아 대표이며 이 회의의 의장인 넬리도프(M. Nelidov)에게 호소했으나, 거부됨은 물론 이 사건으로 고종 황제는 강제로 퇴위 된다.
1907년 7월, 1909년까지 헐버트는 일본의 박해로 헤이그 대표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했고, 미국 전역을 돌며 강연과 언론 회견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08년, 미국 덴버에서 개최된 미국 민주당 윌슨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계기로 한,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미국에서 수립하도록 한다.
1909년 8월부터 11월까지 비밀리에 미국 정부가 주선한 경호원과 함께 한국을 방문, 평양에서 열린 개신교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으며, 고종으로부터 내탕금(內帑金)에 관한 밀명을 받고 중국 상하이에 있던 독일계 은행(덕화은행)을 거쳐 미국으로 귀환했다.
1949년 7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키 위해 40년 만에 내한 했으나, 내한 일주일 만인 8월 5일 서거함에 따라 8월 11일 대한민국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후, 양화진 한강변 '서울 외국인 묘지'(묘지번호 B-9, B-10)에 안장하였다.
1950년 3월 1일, 대한민국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태극장)' 을 추서했으며, 1999년 8월 5일 50년 동안 비어 있던 헐버트의 묘비에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묘비명을 각인했다. 2014년 10월 9일, 대한민국 한글 발전에 대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둘째, 한반도 역사를 몸으로 쓴 또 다른 역사가
헐버트와 함께 한반도 역사를 몸으로 쓴 또 다른 역사가가 있다. 호이레스 알렌(H. N Allen, 1858-1932)이다. 의료 선교사인 알렌은 오하이오 델러웨어(Delaware)에서 태어나 그곳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1881년)와 마이에미 의대를 졸업, 1884년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온다.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구출한 사건을 계기로 왕실의 신임을 얻어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를 개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1887년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이 된 것을 시작으로 주한미국공사, 총영사, 전권공사를 역임했고, 공사재임 시 오하이오 출신의 대쉬러를 한국으로 불러 하와이 이민사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그는 한국에서 운산 금광채굴권과 경인 철도 개설권을 따내는 등 막강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알렌 공사 또한 헐버트와 같은 시기인 1901년 코리아 레퍼 스토리(The Korea Repository)의 편집을 주관 했다.
알렌 공사 이전에 조선의 외교권을 거머쥔 또 다른 오하이오 출신의 외교관이 있다. O.N 데니(O.N. Denny, 1838-1900) 변호사이다. 오하이오 몰간 출신인 그는 청나라 이홍장과 원세개의 추천으로 1886년 조선 국왕의 외교 고문으로 부임하여 한때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한 바 있다. 1891년 귀국, 오하이오주 상원의원(1892-1896)으로 있으면서 오하이오 한국 미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외에도 최장수 여자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 와, 최초의 여자 목사로 안수를 받은 커틀러(Marry M. Cutller, 1865-1948) 선교사가 이 당시 오하이오 포미로이 의대에서 의학박사를 받고 내한했고, 평양 주재 감리회 대표 선교사로 3.1 운동에 깊이 관여된 무어(J. I Moore, 1874-1963) 선교사는 오하이오 사이오 대학을 거쳐 두루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03년 내한했다.
장로교 선교사 알렌 의사의 출신지인 오하이오 델라웨어에는 감리교회 명문인 웨슬리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애국지사 박용만의 삼촌이며 후견자였던 구한말 외교관 박희병(장원)과 이화학당 한국인 교사인 하란사가 2년간 이 학교에서 수학하며 같은 시기, 인접 버지니아 로아노크로 유학 온 이강공 의친왕 일행과 밀접한 교류를 가졌다.
또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녀로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 소녀인 아펜젤러 앨리스와 윌슨 대통령의 여동생이 함께 이 대학에 다녔고 엘리스 아펜젤러는 1916년 한국에 와 일생을 한국 선교사로 마감했다.
셋째, 오하이오 사단
한국 근대사와 미주 이민역사의 모태인 이 역사적 미션의 실체를 한국 근대사에 처음 제기한 이자경 선생(멕시코 이민사 저자)은, 오하이오 미션 주역들을 “오하이오 사단”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주동자(主動者)인 데니 변호사(외교관), 알렌 공사에 이어 오하이오로 차출된 헐버트가 오하이오 푸트남 육군사관학교에 교관으로 있으면서,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아니면 작은 수의 오하이오 사람들이 한국 근대사와 미주 이민사, 한국독립 운동사, 한국 기독 교회사에 끼친 공적은, 주한 미군이 해방 이후 미 군정 시기부터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남긴 공적보다 큰 것이기 때문에 붙여준 이름이 아닌가 추측된다.
존스(Grorge Heber Jones, 1867년-1919년 / 한국명 조원시) 선교사는 헐버트로부터 이 위대한 복음 사역을 인수받아 1902년 5월, 하와이 사탕수수재배자협회 찰스 감독이 한국 노동자를 취업이민 시키려고 한국에 데슬러를 파견, 이 때 존스는 한국인 하와이 이민사업을 아끼지 않으므로 재미한인사회 형성에 주역이 되어 공헌한다.(한국감리교 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년 10월 25일, 464면)
미국 감리교회의 모태인 웨슬리 대학(델라웨어)은 선교 초기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독점해 지원한 곳(오하이오 연회)으로, 한국 감리교회 선교사 80%가 이곳에서 파송되어왔다.
2020년 4월 7일
서대문교회 이주익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