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왜 십자가에 죽으...)의 핵심 부분(막 1:15, 마 16:24의 해석)에 대한 이견

최세창
  • 1884
  • 2020-04-07 05:03:17
마가는 예수께서 전파한 내용에 대해,【막 1: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라고 하였다.
“때”는 카이로스(καιρός)이며 ‘때’(마 8:29, 11:25, 24:45, 막 1:14, 눅 21:8, 롬 3:26) 외에 ‘기한’, ‘시기’(행 1:7, 살전 5:1), ‘기회’(갈 6:10, 히 11:15)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말(카이로스, καιρός)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때’: 마 2:7, 막 2:19, 9:21, 행 1:6, 3:21, 갈 4:4. ‘기한’: 눅 1:57. ‘오랫동안’: 요 14:9, 행 14:3)을 뜻하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달리,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황금 같은 기회 또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시간이나 시대를 의미한다.
“찼고”는 페플레로타이(πεπλήρωται)이며 ‘완성되었다’, ‘성취되었다’, ‘채워졌다’ 등을 의미한다.
그닐카(J. Gnilka, p. 79.)는 “때가 찼다는 표현은 예언자적-묵시 문학적 언어에 일치한다. 이 표현의 배후에는 하느님이 각 시대를 확정짓는다는 지식이 놓여 있다(단 7:22, 겔 7:12, 애 4:18, 계 1:3, 벧전 1:11, 납달리의 유훈서[Test. N] 7:1).”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때가 찼고”란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율법‧양심‧종교‧윤리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체험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구세주인 자기 아들을 보내시기로 미리 정하신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갈 4:4, 엡 1:9. 참조: 사 9:1). 시대의 대 전환인 말세가 예수님의 출현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외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는 예수님의 교훈의 기본 주제이다(W. W. Wessel, H. E. Luccock).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성경이나 외경에 나타나지 않으나, 그 사상은 양쪽에 풍부하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출 15:18),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사 52:7),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와 같은 진술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문장들에 대한 고찰은, 주님의 왕권이 현재적 실재(하나님은 지금 자기 권한을 행사하신다)와 미래의 소망(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통치하실 것인데,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통치를 거역한 모든 것을 진압하실 것이다) 둘 다임을 드러내 준다(W. W. Wessel).
현재(마 12:28, 눅 11:20, 17:21)와 미래(마 13:41-43, 20:21, 막 9:1, 47, 14:25, 눅 22:16, 18, 요 14:2, 18:36, 고전 15:50, 고후 5:1, 갈 5:21)로서의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다. 즉, 유대교 개념처럼 육적이며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영원한 나라이었다(E. Schweizer). 하나님 나라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이다.① 이 통치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개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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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C. E. G. Swift, “Bruce, Metzger”(in W. W. Wessel), W. W. Wessel, W. Hendriksen, C. R. Erdman, D. W. Burdick, R. McL. Wilso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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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격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이며, 이 실제적 구현이 곧 예수님의 인격과 교훈과 생애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움직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 선언은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을 위한 결정적 구절이 되었다.②
“가까웠으니”는 과거 완료형인 엥기켄(ἤγγικεν)이며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그 낱말은 ‘가까이 다가오다’, ‘당도하다’, ‘미치다’, ‘이르다’(욘 3:6) 등을 의미하는데, 이 완료형인 엥기켄(ἤγγικεν)을 임박한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③과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④이 있다. 문맥상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의 본격적인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은 마지막 때인 것이다. “그 때에는 마르코에게도 우주적 사건이 된다. 그 통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느님의 왕국으로 확장된다. 현재 돌입해 오고, 완전한 하느님의 왕국(Gottesreich)에로 치닫고 있는 하느님의 통치는 결단을 요구한다. 이 결단은 돌이킴(Umkehr)과 믿음을 포함한다”(J.Gnilka, p. 8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의 회개하고(메타노에이테, μετανοείτε)는 1:4의 주석을 보라.
믿으라는 피스튜에테(πιστεύετε)이며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W. Hendriksen). 인간의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역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마 16:16-17, 고전 12:3, 엡 2:8).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천국의 삶인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롬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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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London: Collins Clear Type Press, 1971, 7th.
3) J. Calvin, H. Alford, A. Barnes, D. W. Burdick, F. J. Dake, R. McL. Wilson, “마르크센”(in J. Gnilka, p. 80.), J. N. Davies, W. W. Wessel, W. L. Lane, E. P. Gould, W. Hendriksen, J. D. Stevens, 山口 昇.
4) E. Schweizer, “헨혠”(in J. Gnilka, p. 80.), R. Earle, I. H. Marshall, F. C. Grant, J. Gnilka, p. 80, 黑崎幸吉, 마경일.

{출처: 최세창, 마가복음(서울: 글벗사, 2006, 3판 1쇄), pp. 93-95.}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의 부인하고”는 부정 과거 명령형인 아파르네사스토(ἀπαρνησάσθω)이며 ‘단번에 결단성 있게 부인하다’, ‘부정하다’, ‘버리다’, ‘무시하다’ 등을 의미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영, 생각, 욕구, 육체 등의 어떤 요소를 부정하거나, 혹은 자기중심적인 삶의 원리를 포기하거나, 혹은 자신의 유형‧무형의 소유를 버리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존재 자체를 부인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송두리째 내맡김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때에 비로소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란 주님 안에서의 자기 긍정을 초래하는 것이다(빌 1:21, 3:7-9, 갈 2:20).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나 감정이나 욕구 등을 긍정하며 살 때보다는 부정하며 살 때가 더 많다. 그렇다면, 구주 예수님을 위해 자기를 부정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당시의 사형수가 자신이 못박혀 죽을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끌려갔던 풍속을 배경으로 한 표현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부인의 극치이다. 그 관념은 제자들이 보다 높은 생의 목적에 속하는 것들보다 앞선 이기적 관심들에 속하는 모든 것, 심지어 생명 자체를 포기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인 관념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아 고난을 겪고 자신을 죽이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교훈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요구되는 것이다(눅 9:23).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하였다.
그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예수를 “좇지 않는 자도” 주님 예수께 “합당치 아니”한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언행은 인간의 주도적 결단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음으로써만 충족되는 것이다(참조: 요 3:3, 5, 갈 5:16-26).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469-470.}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전체 주석/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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