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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십자가에 죽으셨나? (이계준목사. 연세대 명예교수)
유삼봉
- 2280
- 2020-04-06 03:23:24
레위기 16:7-10, 마가 1:14-15
우리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와 정치 바이러스라는 두 가지 질병과 싸우면서 사순절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 십자가에 죽으셨나?” 이 물음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문제이면서도 평신도는 물론 목회자들도 확실한 답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애매모호한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참조: R. 로어의 <보편적 그리스도> 12장 “예수는 왜 죽었는가”)
미국의 성서학자 R. 로어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를 찾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은 사탄의 노예가 된 인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이해는 현대인에게는 어리석게 들릴지 모르나 중세기까지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사탄이 하느님보다 더 강한 존재이고 예수의 죽음에 대해 사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희극을 낳게 된 것입니다.
이 초대교회의 십자가 신앙은 11세기 영국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의 속죄설(贖罪說)이 나타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의 속죄설이란 아담과 해와가 범한 원죄가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는데 이 죄 때문에 하느님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거록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똑같은 신적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 예수의 십자가가 사탄에게 인간의 죄값을 치른다는 초대교회의 주장과 인간의 죄로 훼손된 하느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댓가라는 안셀무스의 속죄설은 구약성서 레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대 제사장인 아론이 속죄일에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야훼께 속죄 제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악마인 아자젤(Azazel)에게 바칠 속죄 제물로서 광야로 때려 쫓아버렸던 것입니다.(16:7-10)
우리는 이렇게 상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론의 두 마리 속죄염소(scapegoat: 이 말은 초기 영어성서 번역의 escaping goat 도망치는 염소란 말에서 비롯됨.)가운데 하나는 야훼의 제단에 올려지니 행운아이고 다른 하나는 매를 맞고 광야로 쫓겨나 아자젤에게 바쳐지니 불행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두 마리는 인간의 죄 때문에 희생되는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똑같이 가련하고 비참한 운명을 지닌 것입니다. 만일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동물 학대란 죄목으로 고발당할 것이 확실합니다.
원시적 의례인 속죄 제사는 이스라엘 민족을 단결시키고 죄책감에서 해방을 주었으며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거쳐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까지 전승되었다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흔적은 우리가 드리는 사죄의 기도나 고백의 기도와 함께 성만찬 때 부르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셀무스의 속죄설은 한국에 처음 온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된 것을 보면 속죄양의 미스테리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속죄설이 신앙고백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죄를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전가시키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에게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누가 23:34)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책임 전가를 밥 먹듯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저 여자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유대인 때문이다.’ ‘전 정권 탓이다.’ ‘그들은 이단이다.’는 등 자동적이고 태생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책임 전가를 일삼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 이후 책임 전가는 줄곧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현대심리학이 발달하기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하니 인간의 에고 ego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만 합니다.
우리는 지난달 코로나바이러스가 대구에서 위세를 떨칠 때 이런 현상을 밝히 보았습니다. “대구 바이러스”, “신천지 바이러스”, “첫 감염자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다”, “신천지교회는 이단이다.”는 등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속죄양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는데 광분한 것입니다. 이렇듯 속죄양 만들기는 인류 역사 이래 그칠 날이 없었고 우리가 아는 대로 특히 중세기 이후 “마녀사냥”이란 명목으로 오늘이란 문명사회에까지 전염되어 백주에 자행되는 가장 포악한 범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책임전가는 한 순간의 해방감은 줄지 모르나 죄가 탕감되거나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기만과 위선이란 이중의 무거운 죄를 걸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근자에 종영된 TV드라마 “Love is beautiful, Life is wonderful”에서 노인을 치사한 아들의 교통사고를 흙수저 청년에게 덮어씌웠던 대법관이 대법원장 후보를 포기하면서까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공개 사과를 단행합니다. 그 때 무거운 죄책감이 해소되고 얽혔던 인간관계가 풀리면서 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책임 전가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지는 데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왜 십자가에 죽으셨나?” 이 질문은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고 모든 해석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복음의 핵심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을 안경 삼아 성경 전체를 볼 때 십자가의 진수를 밝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마가복음 1:15 “때가 찾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탄이 인간의 죄값을 요구하거나 절대자가 자기 명예회복을 위해 아들의 죽음을 강요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과 정의 안에서 어울려 사는 인간 공동체 입니다. 예수께서는 책임 전가라는 폭력으로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노예화하는 로마제국과 유대교에 시달리는 민족을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다가 권력과의 충돌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책임 전가란 폭거가 지배하는 세상을 향해 하느님 나라 곧 사랑과 정의를 중심으로 하는 책임사회를 선포하고 실현하다가 희생된 고난과 희망의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 죄를 지는 속죄양이 아니라 크리스천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책임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상징임을 깨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 16:24)는 말씀의 참 뜻입니다. 4. 15 선거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놓고 나라의 존망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크리스천이냐 아니냐 라는 정체성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패자의 죽는 길이 아니라 승자의 부활 생명 곧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끝 모르는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병은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악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원초적 진실은 바이러스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인종, 계층, 빈부와 상관없이 평등하고 서로를 위해서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특히 개인주의와 독선과 독단 그리고 이념으로 파열된 우리 사회가 겸손과 절제, 이웃에 대한 배려와 공생을 위한 자기희생을 배우고 실천하므로 책임사회 곧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호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의 부실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의료진과 봉사자들 및 온 국민이 질병에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하므로 온 세계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현상을 통해 하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홀로 구원받을 수 없고 모든 사람과 함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온 인류와 함께 하느님 나라 곧 살만하고 보람찬 공동체를 이 땅에 건설하고 행복이 충만한 인생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역병은 여기와 거기서 누릴 영원한 구원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월초 조선일보 문화부장 김윤덕 씨는 칼럼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천국은 종말의 그날 금마차 타고 간다는 저 하늘에 있지 않았다. 의사들이 생명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고 자원봉사자들이 엘레베이터를 양보하려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주말도 없이 일하는 간호사들은 한없이 쏟아지는 의료 폐기물을 처리하는 이들을 더 걱정했다. 이웃을 내몸처럼 돌보느라 아수라장이 된 이곳이 다름 아닌 천국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때 저 세상으로 가는 무지개가 떠오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통해 온 인류를 영원한 삶으로 초대하는 상징이고 우리도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함으로써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요청에 기꺼히 응답하므로 여기와 거기에서 온 인류와 함께 새 생명, 참 자유, 참 행복의 삶을 누리게 되기를 빌며 말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