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서드】삼일단상(參日斷想)

함창석
  • 1369
  • 2020-04-13 21:21:28
삼일단상
參日斷想

시인/ 함창석 장로



무덤은 송장이나 유골을 땅에 묻어 놓은 곳이다. 죽은 사람이 묻히는 장소. 흙으로 둥글게 쌓아 올리기도 하고 돌로 평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대개 묘석을 세워 누구의 것인지 표시한다. 무덤은 어원적으로 볼 때 ‘묻다[埋]’라는 동사의 어간 ‘묻’에 명사화 접미어 ‘엄’이 맞춤법의 규정에 따라 ‘무덤’으로 표기된 것으로서 ‘죽[死]+엄’이 ‘주검’으로 표기되는 것과 같은 예이다.

전기 구석기시대도 지구라는 이 땅 여러 지역에서 이런 풍습이 행해졌으리라고 추측하지만,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동양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그 흔적이 나타난다. 동아시아의 경우, 북경 부근의 주구점 상정동유적은 약 1만 8000년 전의 것인데 1933∼1934년의 조사 때 7인분의 화석 인골이 동구 상실의 지하 제4층에서 석기·골각기·동물의 뼈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지석묘는 한반도의 가장 독특하고 전통적인 무덤형식이다. 그 구조는 지상에 커다란 돌을 괴어 올려놓은 것인데 분구를 따로 만들지 않으므로 우리의 무덤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거리가 있다. 지석묘의 분포는 함경북도의 일부지역과 울릉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과 연근해의 섬에 이르기까지 고루 퍼져 있다. 만주 요동반도와 일본 구주지방에도 적지 않은 수의 지석묘가 있다.

우리 선사시대의 커다란 고인돌(지석묘)이나 경주의 왕릉은 물론이거니와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진시황 능과 같은 장엄한 무덤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거기에다가 오늘날 우리 주변의 호화 분묘들을 보면 여기서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기념 또는 과시용으로서의 기능이다. 다시 말하여 죽은 자를 추모하는 상징이거나 어떤 힘을 과시하기 위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무덤은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신분에 따라 다르게 불리었고 규모나 내용도 달랐던 것이다. 능(陵)은 황제, 황후, 국왕, 왕후, 원(園)은 황태자, 황태자비, 왕세자, 왕세자빈, 황제를 낳은 후궁, 국왕을 낳은 후궁, 묘(墓)는 후궁 친왕, 친왕비, 공주, 대군, 대군부인, 왕자, 군부인, 공주, 옹주, 대원군, 부대부인, 폐위 황제, 폐위 황후, 폐위 국왕, 폐위 왕비, 일반 백성들의 무덤이 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흔히 모스크 옆에 위치한 무덤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쪽 동네에서는 왕이나 성자, 고위 성직자의 무덤을 아예 집처럼 지어서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식으로 만들기도 하며 여기에서 기도하려는 방문객으로 붐비기도 한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죽은 이에 대한 기도를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지만 시아파가 성자숭배를 인정한다.

유대인들은 무덤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신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굴에 넣고 바위로 막아서 부정 타지 않게 했을 정도며, 현재도 이스라엘의 공동묘지는 외딴 사막지역에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비상시에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히브리인들의 무덤은 석굴총분 이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서는 자연 동굴이나 바위를 파서 인위적으로 무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1구를 안치하는 무덤에서부터 많게는 40-50구 정도의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는 다양하였다. 그리고 입구에는 짐승으로부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옮겨야 이동이 가능한 큰 돌문으로 막아 두었다.

예수께서 묻히신 무덤의 입구에도 큰 돌문이 놓여 있었다. 돌기둥으로 비석을 세우거나 상수리나무와 같은 자연물로 위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학자들에 의하면, 돌문은 둥근 형태로 되어 있고 무덤 입구에는 가로로 길게 파이어 있는 경사진 홈을 따라 한쪽으로 밀어 열 수 있게 고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역시 여러 사람이 함께 밀어야 움직일 만큼 돌문은 크고 육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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