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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알고 있기엔 아까와-네오 맑시즘에 대해 소개한
현종서
- 1650
- 2020-04-12 08:48:28
신 맑스주의와 현대 기독교에 대한 그 영향
1969년 봄 튀빙겐 대학교에서 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1960년 대 후반 학생반란을 야기한 신맑스주의자의 실재를 개인적으로 철저히 겪었다. 그날 수요일 오후에 나는 예전처럼 내 세미나를 하려고 선교학 연구소로 갔다. 조교와 아내가 수행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놀랐는가? 우리가 세미날 실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웅성거리는 학생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신학도들이었지만 내 세미나에 참석하는 학생들은 아니었다. 내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마지막으로 열면서 나는 내 책상이 그 무리들의 지도자에 의해 이미 점령당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학생은 노골적으로 선언하기를 오늘 나(바이엘 하우스 박사)는 이 수업을 하지 않도록 되었다고 하였다.그 이유는 학생 자신들이 “자율적인 세미나‘를 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주제는 "자본가 체제의 제3세계 착취를 옹호하는 기성교회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그 토의에는 참가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다. 물론 나는 그런 분위기 하에서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곧 이 연구소의 관리자로서의 내 권리를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준비한 성명서를 읽고 곧 떠나도록 단순히 동의해 주었다. 그 그룹은 다른 교수들의 강의에도 비슷한 ”침입“(go ins)을 연출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였다. 저 일은 우리의 전 ”에벨하드 칼 대학교“의 전복 의도를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좌경학생들은 우리 대학교의 한 명예교수였던 선진 신 맑스주의자교수가 떠난 후에 그 대학을 ”에른스트 볼로흐 대학교“라 개명하였다.
1. 맑스주의-레닌주의의 신 맑스주의로의 변형
(1).신맑스주의자의 출현
맑스주의 이념은 역사를 지내면서 이전 강의에서 말한 것처럼 몇가지 변화와 지역적인 개작을 하였다. 1960년대에 보통 “신맑스주의”로 알려지며 새로운 브랜드가 공적인 출현을 하였다.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자는 그것을 농담삼아 “세련된 사람들을 위한 맑스주의”라 하였다. 그것에 의하여 신 맑스주의는 고전적이며 기존의 맑스주의와 구별되었다. 왜냐하면 저것은 그것 무산대중에게 발언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주의로 타락하였고 마침내 대중들을 “노동자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실패하였다. 신 맑스주의자는 그 실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서구에서 일반적인 사회 경제 상황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그래서 보통 근육 노동자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남아잇는 이들은 대혁명에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자 집단에서 질문이 일어났다. “혁명의 대리인들이 더 이상 노동자들 사이에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우리는 새로운 혁명의 주체들을 발견할 것인가? 놀라운 대답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사회에 영향력이 있고 새로운 생각에 열린 마음을 가진 자유적인 지성인들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 학생들은 현대화된 맑스주의자 사상의 수용자가 되도록 선택되었다. 그리고 대학교들은 대담한 혁명적 실험들을 위한 첫 장이 되어야 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학생혁명에 의해서 일어났고 그것은 서독으로 건너갔고 또 다른 많은 나라들로, 그리고 일본에 까지 건너갔다.맑스주의의 뛰어난 지도자들은 4명의 독일 유대 사회철학자 :데오도르 아도로노,맑스호크아이더,유르겐 하머마스(그들 사이에서 가장 해박한 학자) 그리고 학생혁명의 인기있는 아버지, 헐버트 마르쿠제이다. 본래 그들은 1929년 에 건립한 프랑크후르트 대학교 사회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연구소는 맑스의 문화비평에 집중하였다.그들은 ”프랑크후르트 사상학파“를 출범시켰고 그들의 철학적 접근을 ”비판이론‘이라 불렀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자기들의 관심이 모든 기도 전통과 연구소들에게 철저한 비판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표명하였다. 1933년 힛틀러가 권좌에 오르고 반셈족 박해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주에 정착했다. 전쟁이 끝난후 마르쿠제는 미국에 머물러 ,버클리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한편 그의 세 동료들은 독알로 되돌아 가서 그들의 저서로서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신맑스주의자 프랑크후르트 학자들은 반 셈족주의,파시즘,나치적 사회주의의 근본원인 연구에 전력을 기울였다.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 무리들은 서구 기독교 문화의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발견되었다. 그 성격은 최종적으로 자연과 인간 역사의 주인인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개념에서 연원되었다고 보았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권위적 통치의 표현이었고 동시에 그것은 다른 인간존재들 위에 인간존재의 권위를 합리화 하였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남편과 아내,주인과 종,왕적 지배자와 시민들의 통치관계속에서 수립되었다. 우리의 언어들 조차 그러한 권위주의적 사고,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형상 그리고 또한 주부가 전문장 들의 문법구조에 의하여 의하여 형상화 되었다. 그들이 주장한 권위주의적 사고는 독일에 권위주의 왕국 프러시아를 만들어 냈고 필연적으로 아리안 종족 주의 반셈족주의와 종국에는 아우슈비치의 유대인 “학살”의 공포에로 까지 나아가게 했다. 그러므로 “비판이론”의 창건자 신 맑스주의자는 는 2차대전 패전후 독일인들은 철저히 재교육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윤리적 규준과 문화적 가치를 포함하여 모든 전통적 개념들은 원천적으로 의문시 되어야 한다. 권위의 원리위에 기반을 둔 모든 사회적인 구조들은 비판적으로 분석되어야 하고 평등을 선호하도록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아카데믹 기관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들 자신의 연구 방법들로서 내용을 정의 하기 위해 교수들의 기존 권위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또한 자기학생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교수들의 위치를 또한 비난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독일교육체계의 지도지침은 “해방교수법”에 의해 성립되었다. 따라서 모든 모국어의 교과서, 역사와 종교는 신맑스주의 관점에서 다시 기록되었다. 이 이념에 의해 전적으로 형태를 갖춘 새로운 세대가 자라났다. 그것은 특별히 독일에 있어서 문화 전통의 철저한 붕괴를 의미한다. 그리고 서유럽 몇몇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하다.
(2).신 맑스주의의 기본 교리적 학설
프랑크후르트 학파의 대표들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것의 모습을 달리하는 이론은 수백권의 책들과 잡지에 나타나는 수천편의 기사에 표명되고 있다. 더욱이 프랑크 후르트학파의 4명의 창건자들은 서로간에 모든 관점에 동의 하지 않는다. 그 다양성은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더욱 넓어진다. 하지만 몇가지 주요한 경향들이 분석되고 있다.
A). 구조적 지배의 비판주의
출발점은 모든 사회적인 정치적인 구조와 그들의 권위적 특성을 합리화하는 기초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인간존재는 내적 열망에 다라 완전한 자유속에 이것이 동료인간 존재와의 평등속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도록 운명되어졌다. 이것이 반(semi-)동물적인 사람들, 원시적 무리들이 산 형태이다. 원시 악이나 “죄에 빠짐‘은 댜른 인간들과 자연에 대한 지배를 열망함이었다. 자연의 위험을 막기 위하여 인간들은 그것을 관리할 기술과 동력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이 과정이 창조들을 거스르게 되었다. 자연은 개발되었고 인간의 삶은 엔진기관, 기계장치, 더 나아가 더 우월한 기술을 갖춘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에 대한 지배를 부과하였다. 그래서 멀지 않아 통치의 구조들은 종족과 민중들의 사회적 기구에 소개되었다. 세계관 역시 지배체계를 반영하고 자본주의, 종족주의, 성차별주의 같은 악을 생산해 낸다. 모든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지배의 이기적인 형태에 윤리학, 종교들,교육원리들은 그것들을 만영하고 합리화 하였다. 그러한 역사적인 조망은 맑스와 신 맑스 이념과의 기본적인 일치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차이는 서구문명의 비참함을 극복하는 치료방법의 제시에 있다. 고전적 맑스주의적 접근은 분명히 경제적이다. 사유재산 체계를 전복하는 데서 그 해결책을 찾는다. 이에 비하여 신맑스주의자들은 지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심리적으로 문제를 야기시킨 뿌리를 본다. 이것이 사회와의 전통과 모든 수준의 교육, : 가족, 유치원,초등학교,중 고등학교, 대학교에 의하여 영속화된 문화 형태로 분류된다. 후자의 것들은 후기 자본체계의 통치를 우선 합리화하는 문화의 체계를 제공한다. 두 번째로 그것의 현학적인 사고속에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세계의 실제문제를 푸는데는 부적절하다. 그러한 평가에 따라 그들의 철저한 개혁은 1968년에 신맑스주의자 혁명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전망이 교회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공공기관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시민의 자유를 축약하여 나타내는 민주질서까지도 근본적 비판에 노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사유재산의 궈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특권을 분쇄하고 모든 행동에 있어 유권자에 의해 감독되는 “기층민주주의”에 의하여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B). 새로운 인간성
어느 다른 이념들처럼 신맑스주의는 모든 정치적인 행동에 영감을 주는 동기 부여로서 유토피아적인 비젼을 갖는다. 그것은 “통치가 없는 사회”, 즉 어떤 지배가 없는 전혀 새로운 사회질서이다. 그 목표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는 상태를 위하여 일해야 하였다. 그때, “새인간” 또는 “새 인간성”은 –모든 압제로부터 자유로운-참된 자아를 실현할 그것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이 희망은 불타는 열열함으로 간직된다. : 그것은 종말론적인 특징을 가진다. 신맑스주의에 있어서 “새 인간성”은 하늘에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인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마24:30이하)에 해당되는 세속적 대치물이다. 나는 1970년초 나의 튀빙겐대 동료교수, 유르겐 몰트만과의 대화를 회상한다. 나는 그의 종말론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알고 싶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재림을 믿는지를 물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대답하였다. : “예, 이것은 어떤 상호 압제가 없는 함게 평화롭게 사는 모든 인간존재에 의해 명백해지게 될 것입니다. .” 그것은 나의 동료가 내게 신맑스주의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파루시아)를 해석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몰트만이 그러한 사고방식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저것이 바로 “메시야 맑스주의”라 불리우는 신맑스주의내의 한 특수노선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 바이엘 하우스 박사는 루터교회목사로, 독일 경건주의(스페너로 대표되는) 정신을 충실히 따르며 영미 복음주의 사상에 깊이 동감하고 있는 분입니다.)
* 모택동의 문화혁명도 네오 맑시즘의 한 형태로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