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4:6-8(설교: 내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나)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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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8-12 15:33:03
지금까지 종말론적 입장에서 디모데에게 교역자의 직무를 완수할 것을 명해 온 바울(4:1-5)은, 이제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사도로서의 생애를 고백하고 있다. “실로 이 부분(4:6-8)은 죽음을 앞둔 바울 사도의 금자탑적 간증으로 전도자의 직무를 다한 자의 개선가이기도 하다”(이상근).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렇게 명령한 이유(원문에는 6절 초두에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6】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라고 설명하였다.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는 스펜도마이(σπένδομαι)로서 이곳과 빌립보서 2:17에만 나오는데, 두 곳 다 바울 자신의 순교를 예고한 것이다. 이 낱말은 이교도들이 제단 위에 있는 제물 위에 포도주 한 잔을 붓는 제사 관습과 유대인들이 번제물에다 포도주나 독주를 붓는 제사 의식(출 29:40, 민 15:7, 10, 28:7, 14)을 연상하여 표현한 것이다. 헤베이(A. C. Hervey)는 “관제란 항상 희생 제물의 결말을 형성하였다. 그와 같이 바울의 순교는 그의 사도적 섬김을 마감하였다.”라고 하였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떠날은 아나뤼세오스(ἀναλύσεως)로서 {(1) 천막의 끈을 풀고 말뚝을 뽑으면서 야영을 걷어치우는 것, (2) 정박하기 위해 매어 놓았던 밧줄을 풀고 닻을 올리고 출항하는 것, (3) 문제를 푸는 것, (4) 해방되는 것 등의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란 일시적인 지상 생활을 걷어치우고 천국에 계신 주님을 향해 출항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모든 인생 문제에 대한 종국적 해결을 가져오는 것이다}(빌 1:23의 주석).
기약(카이로스, καιρὸς)은 디모데전서 6:15의 주석을 보라.
가까웠도다는 에페스테켄(ἐφέστηκεν)으로서 ‘이미 이르렀다’는 뜻이다(White,① G. R. Berry). 즉, 옥중에서 이 글을 쓸 때에 바울은 이미 순교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처지에 있던 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의 생애에 대해,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고백하였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는 경기장 비유로도, 전쟁 비유로도 볼 수 있다(딤전 4:10과 6:12의 주석을 보라). 대부분의 학자들②은 전자를 취하였지만, 오히려 후자를 취하여 각기 다른 비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다음 것은 운동 경기, 그 다음 것은 종교에 비유한 것이다.③ 아무튼, “이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능력으로 참된 성취를 이룩한 데서 비롯된 참된 자랑이다”(W. 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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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2) W. Lock, W. Barclay, R. Earle, p. 435, F. D. Gealy, “Vincent, White”(in 이상근), J. G. Gould, A. C. Hervey, C. R. Erdman, A. Clarke, R. S. Nicholson, C. S. Wemp, L. Morris, 채필근, 박윤선.
3) R. Earle, p. 435, J. Calvin, M. Henry, A. Barnes, A. M. Stib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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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란 운동선수가 정해진 경주로를 마지막까지 다 달린 것처럼,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인생행로를 끝까지 다 달렸다는 것이다(행 20:21, 고전 9:24, 빌 3:14. 참조: 행 13:25, 히 12:1).
인생에 있어서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끝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점을 볼 때, 바울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바울의 경기는 “장거리 장애물 경기였다”(F. D. Gealy). 완주의 비결에 대해,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말하고 있다.
그와 대조되는 인물로 사울을 들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후회 거리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믿음을 ‘지켰으니’(테테레카, τετήρηκα: 딤전 5:22의 주석을 보라.)란 두 가지 배경과 두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 헬라에서 큰 경기는 올림픽 경기였으며, 이 경기 대회에는 세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선수들이 모두 모였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날에, 모든 참가 선수들이 모여서 헬라의 여러 신들 앞에서 10개월 이상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과 또한 결코 승리를 위해 비열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것을 엄숙하게 선서하였다(W. Barclay). 바울이 그러한 배경에서 한 말이라면, 그 요지는 주님을 믿는 신앙의 규정(교리)을 지켰다는 것이다.④
둘째, 그것은 사업상 하는 말이다. 즉, 계약상의 여러 조건을 지켰고, 그 약속에 대해서 성실했다고 하는 뜻이다. 바울이 그러한 배경에서 한 말이라면, 그 요지는 ‘주님께 대해 신실했다든가 충성했다는 것이다.⑤
여기서는 전자를 취해야 하나, 후자를 배제할 수는 없다. 그 까닭은 믿음 또는 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여기의 세 동사인 싸우고, 마치고, 지켰으니가 모두 완료형이라는 것이다. 즉, 그 사실들이 과거에 완료되었고, 지금은 그 완료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과거를 회고하면서 유감이 없는 사도로서의 신앙생활을 고백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소유하게 될 확고한 소망에 대해서,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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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 Clarke, “White, Vincent”(in 이상근), “Van Leeuwen”(in 박윤선), C. R. Erdman, W. B. Wallis, R. S. Nicholson, A. M. Stibbs, L. Morris, 박윤선, 이상근.
5) J. Calvin, “Jeremias”(in 박윤선), W. Lock, W. Hendriksen, M. Dibelius, J. R. W. Sto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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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후로는은 로이폰(λοιπὸν)으로서 {‘종말로’, ‘덧붙여서’, ‘결국’, ‘나머지는’, ‘그 밖의 것에 대하여는’, ‘남은 것은’을 의미한다. “이 말은 새로운 주제로 옮기기 위한 것이다. 곧바로 나오는 내용에 대한 소개이지, 앞의 내용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Vincent)}(살전 4:1의 주석). 지금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4:7), 이제 남은 것은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받는 일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의 면류관(호 테스 디카이오쉬네스 스테파노스, ὁ τής δικαιοσύνης στέφανος)에 대해서는 (1) 영원한 의로 구성된 면류관이라는 설(Huther,⑥ J. Wesley, 黑崎幸吉), (2) 의와 면류관을 동의어로 보아 칭의라고 하는 설(J. R. W. Stott), (3) 정당하게 주는 면류관이라는 설(Mathias),⑦ (4)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의로운 생활에 대한 상급으로 주는 면류관이라는 설⑧ 등이 있다. 전후 문맥상 (4)설이 가장 적합하다.
의의 면류관”과 유사한 표현들로는 “영화의 면류관”(잠 16:31), “영화로운 면류관”(잠 4:9, 12:4, 사 28:5), “영광의 면류관”(렘 13:18), “아름다운 면류관”(사 62:3), “화려한 면류관”(겔 16:12, 23:42), “교만한 면류관”(사 28:1) 등이 있다. 신약성경에도 “썩을 면류관”(고전 9:25),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금 면류관”(계 4:4) 등이 있다.
면류관은 (1) 왕에게 씌워 주권을 표시한 것(왕하 11:12, 시 21:3, 렘 13:18), (2) 로마나 그리스에서 전쟁이나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 준 것(고전 9:25, 딤후 2:5), (3) 공적인 영광이나 기쁨을 표시한 것(사 28:1) 등이다. 여기서는 (2)와 (3)의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면류관은 바울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주님을 모르거나 알아도 믿지 않는 자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대신에 오히려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만이 주님의 재림을 열렬하게 대망하는 것이고, 그들만이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이다.
의로우신 재판장은 4:1의 주석을 보라.
그 날은 1:1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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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n 이상근.
7) 상동.
8) M. Henry, A. Clarke, “Chrysostom”(in 이상근), F. D. Gealy, A. Barnes, 박윤선,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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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디모데전·후서·디도서·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292-296.

※ 참조: 딤후 4:1의 주경신학적 연구

바울은 최후 심판을 내세워 젊은 교역자인 디모데에게 사명을 완수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는 【1】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때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두고 하는 장엄한 명령이다. 이러한 형식은 디모데전서 5:21과 6:13-14 그리고 디모데후서 2:14 등과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교회의 모든 초기 신경(信經)에서 발견되는 말씀이다(참조: 마 25:31-46. 사도신경). 물론,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다(4:8, 고후 5:10).
여기에 나오는 산 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여전히 지상에 살아 있을 자들을 가리키고, 죽은 자는 그 때까지에는 이미 죽어 있을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상 죄를 지시고 죄인들에게서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위엄을 갖춘 재판장으로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행하는 일은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족시킬 만큼 선한 것이어야만 한다. 자기의 일을 가지고 가서 예수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인간의 비판이나 판결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탐내야 할 한 가지는 ‘잘했다!’는 예수님의 칭찬을 듣는 것이다. 만일 교회에 있어서나 이 사회에 있어서나 우리가 이와 같은 정신으로 각자의 일을 행한다고 하면, 인생이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한 인생 태도는 인간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감정을 상하게 되는 과민한 정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개인적인 권리와 특권과 관계되는 거만한 정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그리고 또한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으로부터 감사와 칭찬을 받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정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인간의 배은망덕 때문에 받는 마음의 상처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기독교인이 전심전력해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밖에 없다”(W. Barclay).
그의 나타나실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다(딤전 6:14의 주석을 보라).
엄히 명하노니는 디아마르튀로마이(διαμαρτύρομαι)로서 법적 확인의 중요성을 지닌 말이다(J. R. W. Stott, “심프슨”). 이 낱말은 ‘확실하고도 엄숙하게 증거하다’(눅 16:28, 행 2:40)를 의미하며, 여기서 ‘엄숙하게 명령하다’, 또는 ‘진지하게 권면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결국 바울은 디모데에게 생각과 말 그리고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재림주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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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처: 최세창, 디모데전·후서·디도서·빌레몬서(서울: 글벗사, 2002, 2판 2쇄), pp. 282-284.

※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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