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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서드】환속제명(還俗除名)
함창석
- 1415
- 2020-04-20 04:35:23
還俗除名
시인/ 함창석 장로
우리는 고* 시인을 노벨문학상 후보라든지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 작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시인은 그냥 시인일 뿐, 그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화려할수록 진가는 오히려 삭감되는 것은 아닐까?
고* 시인 본명은 고*태로 1933년 8월 1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한국의 전직 시인이다.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했었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하였으며 또한 1987년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적 문화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설하였다.
1982년 그의 나이 49세에 이*화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983년 50세에 딸 차*을 얻었다. 그 뒤 2018년 미투 운동 때 연이어 성폭력 추문이 터지면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에 태어나 친일을 하는 동족들과 어린 시절부터 자주 불화를 겪었다고 한다. 한 때 불교에 귀의, 승려가 되었다. 그는 사회에 참여하며 1962년 환속(還俗)을 선언했다.
1950~60년대에는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등을 노래했다면, 1970년대 이후에는 어두운 시대 상황을 비판하고 현실에 대한 투쟁 의지를 담은 시를 썼다. 1980년에 내란음모죄로 투옥되었다.
1970~80년대 들어서 사방이 캄캄했던 시절에 맺은 기독교와의 인연 문익환·김재준·박형규 목사뿐 아니라 안병무·이효재 교수, 장준하 선생 등 교제하였다. 특히 문익환 목사와는 형제처럼 지냈다고.
고* 시인은 저항운동을 하며 문익환 목사와는 가장 밀착된 형제였다. 둘이 만나면 좋아서 껴안고, 춤추곤 했다. 서로 나이 차는 있었지만, 문 목사는 나이 차이 같은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는 어린아이와도 친구가 되는 사람이다. 그런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다. 고은 시인은 문 목사 안에 진화가 안 되는 소년이 들어 있어 특별한 인물이 세상에 있다고 기이해 하였다고.
1983년 크게 알리지 않고 함석헌 선생의 주례로 중앙대 이*화 교수와 결혼했다. 결혼식을 세상에 펴서 장 보는 것처럼 하는 것보다 뜻이 있는 사람들과 깊은 축복 속에서 하면 좋겠다고 여겼다.
문익환 목사가 옥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론의 영향도 있었으니까, 잠깐 장례 기간에만 나올 수 있었다. 장례식장 안에 교도관도 있었으나 서로 반가워서 껴안고 있다가 춤을 췄다고.
빈소는 애도하고 언동을 조심하는 자리인데, 상제가 벌떡 일어나서 껴안고 춤추고 하니까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 자리가 축제처럼 되어 전부 박수하며 즐거워했다고.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한국 개신교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역사를 칭찬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가 상업주의·대형화 등의 늪에 빠진 것에는 탄식했다.
시, 소설, 비평 등 문학을 하는 그는 ‘성서가 시’라고 생각하였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성경구절을 낭독할 때 그의 눈매와 입매는 날카로웠고, 배에서부터 나오는 소리는 단호했다.
옥에서 읽고 깨달았고 몸으로 받아들였던 그 감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구절도 짱짱하게 뿜었다.
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구절을 읽을 때는 ‘이렇게 말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느냐?’며 마치 제 종교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는 나사렛 사람이었다. 나사렛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여기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 그가 자기 마음에 맞는 12사람의 제자들을 모은 곳이 갈릴리 호수다.
자연을 두려워하였던 원시종교를 보면 처음에 신을 알게 되는데 짐승들이 신을 아는지 모른다. 인간은 신을 느끼고 모시게 되었다. 신을 발견하고 모시는 것 자체가 시인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래 종교의 시작은 시다. 성서를 읽어 보라. 발음을 들어 보면 시다. 세상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정연하게 전개한 이론보다 예수의 시적인 표현에 더 매혹당하지 않았는지 이게 문학의 힘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종교에 권력이 개입되고, 제도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종교는 옛날의 시적 상태가 아니고, 권력 구조가 만들어져 있는 시스템으로 변질됐다. 시스템 속에서 종교를 좇고 있다.
근본적으로 한국 개신교는 서양 기독교와 다르다. 오복 등 이 세상의 복을 강조하는 기복에 치우쳐 있다. 우리는 원시 사상인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을 한반도 고대 농경 사회에 토착화시켰다.
어떤 신학자는 '무교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유전인자가 됐다'고 했다. 지금의 불교와 기독교에 샤머니즘 요소가 많이 발견된다. 또 외래 종교로서 고대 불교를 받아서 천년 동안 자주화했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중세까지 불교를 장기간 아주 진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근세에 와서는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중국 본토보다 더 지독하게 성리학을 자기화·교조화·근본화했다고 한다.
우리는 근대에 기독교를 직접 들여오기도 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했다. 여러 전근대적인 고귀한 전통 사상 말고도 폐단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데 기독교가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민족의식도 싹트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것이 모세의 출애굽과 같았다. 이런 것이 기독교가 아니었나. 개신교 인사들은 3.1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근대인으로서 기본 자질을 형성하는 데도 기독교가 많은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일제를 물리치고 민주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때 고* 시인은 기독교와 만났으나 기독교인은 되지 못했다.
‘그분은 승려출신이라는 자긍심이 항상 있었고 입으로는 수없이 기행적인 행동과 성희롱 발언을 언급 했을지언정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는 성추행 기행은 아니다.’라고
영국의 애스틀리씨는 또 “블러드액스 출판사는 ‘성추문 스캔들로 인한 그의 추락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누린 명사로서의 지위와 대중적 찬사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참고로 한림원의 종신위원과 그 주변 인사들이 지난 수십 년간 온갖 종류의 성폭행을 공공연히 저질러왔지만, 그들의 위세에 스웨덴 문단이 모두 침묵하면서 여태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7년 - 2018년 미투 운동 때 수십 년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해 왔다는 게 밝혀져 모든 분야에서 제명되었다. 노벨상후보라든지 그 동안 쌓아왔던 명예가 무너져 버린 상황이 전개되었다.
악이 악다워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권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재력이든, 지식이나 기술 혹은 특수한 재능이든 상대를 강제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만 악은 악답게 자랄 수가 없다.
힘이 없는 악은 의미가 없다. 고* 시인에게 악이 의지해 자란 힘은 말과 글을 다루는 재능이었다. 말의 재능은 이상, 한용운, 서정주 등 그의 ‘명사(名士) 사냥’ 시절에 이미 충분하게 발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