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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피조물들의 공동체(이계준목사/연세대 명예교수)
유삼봉
- 1582
- 2020-04-28 05:02:31
고후 5:16-21 골 3:5-11
오늘 우리 교회가 창립 38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지금까지 교회의 개척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교역자와 평신도 여러분에게 치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온 인류를 위협하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수 주일 동안 각 가정에서 영상예배를 드렸는데 이를 위해 수고하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비록 우리가 서로 얼굴을 대하지 못해 섭섭하였으나 예배드릴 성전은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도 성전이고 우리 마음도 하느님의 집이라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존재 의미와 사명을 다시 확인하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 태어난 피조물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응답으로써 이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요 3:5) 존재를 뜻합니다. 세례 의식을 통해 입교한 “교인”은 성령의 세례를 통해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성령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그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존 웨슬리는 ’양심의 소리가 곧 하느님의 음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일원이지만 거기에 길들여지지(domesticate) 아니하고 예수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유유자적하는 성숙한(matured) 존재로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와 교육과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훈련하고 세상으로 흩아져서 봉사와 선교의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생활의 입력과 출력이 균형을 이룰 때 새로운 피조물의 사명은 충족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제도적으로 평신도 중심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처럼 교황이나 사제 중심의 상하 구조가 아니라 개신교의 본질인 목회자와 평신도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수평적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목회자는 교회의 제반 활동에서 선도하지만 이것은 평신도에게 순례의 길을 안내하는 도우미의 역할을 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 교회가 초창기부터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잘 정착된 것은 특히 개척하신 원로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께서 귀감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단과 많은 교회들이 부끄러운 스캔덜에 빠져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지만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것은 실로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은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 3:10)고 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 영적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참 지식인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화(聖化) 곧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에까지 계속 진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참 지식에 이르는 모델입니다. 그는 갈릴리 회당에서 율법을 성실히 학습하고 그것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비판 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을 따르려는 영적 훈련을 통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요 10: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5:38)고 토로하는 차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복음 전도자를 육성하려고 세워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만을 갈망하는 유아기적 교인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그리스도의 사절”(고후 5:30)을 훈련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연구와 신학연구를 시작한 동기입니다. 21세기란 불확실한 시대에서 복음으로 무장한 사도들만이 개체주의, 물질주의, 무신론이 창궐할 세상에서 주어진 사명을 십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대부분 무학자였으므로 주님의 행적을 증언하는데 한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주님의 제자가 아닌데도 복음의 창조적 증거자와 최초 및 최다의 성경 저자가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화에 기초를 놓은 사도가 된 것입니다.
회고해 보면 개척 준비단계에서부터 시작된 신학 및 성서 연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소되고 내용이 변하는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가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피조물로 선택받은 사도임을 자각하고 그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필수조건인 신학 및 성서 연구에 큰 관심을 쏟아야 하리라고 생각 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보다 먼저 일본교회와 미국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평신도의 신앙과 신학을 위한 서적의 발행과 신학강연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서 사도직에 대한 각성과 헌신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 신앙에는 신학이 필요 없을지 모르나 복음의 사도에게 신학은 필수적 도구임에 틀림없습니다.
비록 우리 교회가 크리스천 지성인들을 위한 계간지 <성서와 문화>를 발행하고 탐독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유동님 장로께서 초창기에 학습한 성서연구를 타 교단 교우들에게 전달한 것은 우리에게 귀한 모델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새로운 피조물은 화해를 위한 사도들입니다. 바울은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화해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다.”(고후 5:18)고 했습니다. 화해의 사전적 의미는 ’다툼을 그치고 나쁜 감정을 푸는 것, 법적으로 분쟁을 그치자는 계약‘입니다. 부연하면 화해는 적수에 대한 이해, 관용, 희생이므로 그것은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화 된 유대교와 로마제국 치하에서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비인간화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통치로써 착취와 분쟁을 해소함으로 모든 인간이 참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삶을 공유하는 세상입니다. 주님은 그 나라를 선포하시고 화해를 이루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 앞에 닥친 화해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가장 기본적이고 긴급한 화해의 과제는 세 가지 바이러스와 관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존재와 운명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는 것들입니다.
첫 번째는 코로나19바이러스로써 지난 3개월 동안 의료진의 희생과 자원봉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온 국민의 협력으로 전무후무한 공동체 의식을 발휘하고 역병을 극복하는데 세계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총선이라는 정치바이러스인데 여당의 대승과 야당의 참패로 막을 내렸으나 불행하게도 49%대 41%란 투표율로 국민의 분열과 대립을 낳았니다. 더욱이 이것은 영남과 호남, 가정과 교회의 분열마저 초래함으로써 나라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에 먹구름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경제바이러스가 초래한 위기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이에 더하여 국제적 고립주의와 함께 세계적 대공황이란 쓰나미가 밀려오므로 우리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서울대 윤석민 교수는 일간지에서 코러나바이러스 이후에 닥쳐올 2대 쓰나미 곧 국제적 유대의 와해 및 지나친 복지와 방만한 시장주의의 실패에서 오는 세계 경제의 파탄을 걱정하면서 대책을 제시했습니다. ’이 두려운 상황에 맞설 최후의 보루는 외부적 조건에 앞서 우리 내면의 힘 곧 인내, 절제, 나눔의 규범들이 우리의 삶, 자존, 및 고결함을 지켜 준다.‘ 단적으로 우리의 살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자기 십자가에 대해 별 관심이 없거나 기피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종려주일 설교문 “예수는 왜 십자가에 죽으셨나?”를 감리교단 소식란에 올렸는데 클릭이 600이고 리플이 10여 개 달렸습니다. 한 평자만 제 설교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예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의 상관관계를 간파했는데 그 밖에는 예수의 십자가만이 구원이라고 역설하고 우리의 십자가는 증발해버렸습니다. 찬송가 323장 이호운 목사님의 작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를 즐겨 부르면서 자기 십자가를 잊거나 예수에게 떠넘기니 자가당착이 아닌가 합니다.
기독교에는 두 가지 구원설이 있는데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존 칼빈의 예정설(장로교)과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존 웨슬리의 신인협동설(神人協同說)입니다.(참조: 정지련, 조직신학) 웨슬리의 맥락에서 보면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에 힘입어 우리의 십자가를 질 때 성취되며 예수의 십자가가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라면 우리의 십자가는 사람, 계층, 민족, 종교 간의 화해입니다.
우리 인간은 기적을 고대하던 원시시대를 지나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위대한 문명의 시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간의 생명마저 창조할지 모를 과학적 하느님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수천 년 쌓아 올린 상아탑을 삽시간에 산산조각 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정신문화 및 물질문명의 몰락과 함께 천박한 욕망과 안위만을 탐하는 “기생충”같은 존재로 공멸의 나락에 처한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새로운 피조물은 이 엄중한 총체적 위기 앞에서 하느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 오늘의 이 환란이 우리 죄에 대한 심판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피조물들이 온 인류를 위해 화해의 십자가를 지라는 권고입니까?” 화해 없는 십자가는 거짓이고 십자가 없는 화해는 위선임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임마누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모든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시리라 믿습니다. 주님,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