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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똥 종리춘
도현종
- 1406
- 2020-05-05 17:51:51
1. 김개시 김개똥
조선왕조실록은 분명하고 정확한 읽음이 필요하다.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부분이 많기때문이다.
개시의 시(屎)가 똥 시 자이기 때문에 실제 이름은 김개똥이었다고 기록한것도 편협한 역사의 맥락이다. 김개똥 김개시 동일한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개혁 군주인 광해군. 소수파인 대북당을 이끌고 조선의 변혁을 꿈꾼 광해군. 그가 얼마나 개혁을 갈구하고 얼마나 동지를 갈망했는지는 흥미롭게도 그의 이성관계에서까지 드러난다.
김개시가 선조에게 이미 승은을 입어 특별 상궁이 되었다. 광해군이 그녀를 총애하면서도 그녀를 신속하게 자신의 후궁으로 삼지 못한 이유가 김개시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것이다. 철저한 가족간의 불륜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이 그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의 총명함때문이다.
광해군과의 정치적 파트너가 된 사실에서 그가 개혁의 동지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수 있다. 주변에 얼마나 동지가 없었으면 아버지의 여인이라도 불륜의 패를달고일 잘하고 머리 좋은 여인을 애인으로 삼아 동지를 만들려고 했을까 살펴보게된다. 서자 출신이라 설움 받고 소수파 정권의 수장이라 설움 받은 광해군의 인간적 고뇌를 보게된다.
광해군 일기에 따르면, 가장 친밀한 여인은 김개시이다. 광해군 일기에서는 김개시라는 여인이 후궁의 으뜸이었다"고 한다. 김개시는 후궁이 아니라 상궁에 불과했지만, 임금과 잠자리를 가진 승은상궁이라 하여 후궁의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이유로 후궁의 으뜸이라 평한 것이다.
김개시는 행정능력이 탁월했다. 광해군을 대신해서 공문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재가까지 대신해서 처리했다.
문서행정의 원칙은 조선시대에는 한층 더 엄격했다. 왕은 기본적으로 문서로써 통치했다. 그렇기 때문에, 왕들은 문서처리의 부담에 항상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김개시는 뛰어난 계략으로 임금의 마음 사로잡았다.
김개시는 상당히 못난 외모로 유명했다. 그의 외모가 역사기록에까지 남았다. 광해군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다.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으며,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
'나이가 들어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못생겼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대다수 외모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개시의 경우는 외모가 하도 '특별'해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였기에 그 점을 사료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었기에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그의 외모를 평한 것이다.
광해군 일기는 광해군 정권을 전복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지라이 책에서는 광해군 쪽 사람들의 인간성이 나쁘게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정적의 외모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더라도 정적의 인간성만큼은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외모의 비중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에 비해 인간성이 매우 중시됐기 때문에, 역사의 승자는 패자의 인간성만큼은 어떻게든 폄하하려 했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표현은 승자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므로, 수정해야 한다. 이 표현은 왕의 대리적 수행이가능할만큼 지략적 이해가 넓고 풍부했다'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광해군의 정치 활동 위해 후궁 자리조차도 거절한다.
광해군 일기의 부분에서, 우리는 김개시가 그런 두뇌를 바탕으로 광해군 정권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개시는 핵심적인 국정 현안에서 광해군에게 조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쪽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궐 밖으로 자주 외출했다. 그가 광해군 정권의 몸통이라는 점은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기록된 계축일기에서 김개시가 이 정권의 원흉으로 지목된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후궁 자리를 거절한 것은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궐 밖으로 수시로 나가 광해군 정권의 지지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광해군이 갈 수 없는 영역으로 광해군이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당시의 반대파들은 그가 궐 밖의 남자들을 만나러 다닌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것은 근거가 불충분한 흑색선전에 불과했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무기로 광해군의 개혁정치를 지원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광해군이 그를 총애했던 이유이
행정능력과 문서처리능력 외교의 처리과정이 출중해서 광해군을 위해 전략을 짜고 조직활동을 벌인 김개시이다.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광해군과 가장 친밀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가 개혁의 완성을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과 연애를 구분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은 것을 보면 그가 개혁의 완성을 얼마나 갈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 종리춘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요사스러운 것이 여자였다.
제(齊)나라 선왕(宣王) 때의 종리춘(種離春)은 못생겼지만 아름다웠다. 예쁜 여자들이 추한 이름을 남긴 반면, 그녀는 향기로운 이름을 남겼다.
제선왕 때 제나라는 강해졌다. 그것만 믿고 제선왕은 점차 술과 여자에 빠지기 시작했다. 놀기 위한 목적으로 설궁(雪宮)이라는 궁을 새로 짓고, 성밖에 사방이 40리나 되는 원유(苑囿)라는 동산을 지어 그곳에서 사냥을 즐겼다. 또 추연(騶衍), 접여(接輿)같은 학자들을 불러모았는데, 이들은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이었다.
제선왕이 설궁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여자가 설궁 앞에 나타났다. 그 여자는 몹시 못생긴 얼굴이었다. 이마가 넓고 눈은 깊었으며 코가 높고 남자처럼 울대가 튀어나오고 등은 낙타처럼 굽었으며 목이 굵었다. 또 손가락이 길고 발은 컸으며 머리털은 갈풀처럼 메말랐고 피부는 옻칠처럼 검었다.
나는 무염(無鹽)이라는 지방에 사는 사람으로, 성은 종리이고 이름은 춘입니다. 나이는 마흔을 넘겼는데 아직 시집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후궁에 들어가 대왕의 뒷바라지나 하려고 합니다.
황당하게도 종리춘은 임금의 아내가 되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신하들은 그 이야기를 임금에게 전했고, 잔치로 기분이 좋아진 제선왕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다 싶어서 그녀를 불러온다.
“부인은 너무 추하게 생겨, 시골 사람이라도 부인에게 장가들고 싶은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그런데 나를 섬기겠다니 무슨 특별한 재주라도 있는가?
저는 별다른 재주는 없으나, 시늉으로 뜻을 전달하는 방법은 좀 압니다.
종리춘은 곧바로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려 이를 드러낸 다음, 두 손을 두세번 들었다가 내리면서 무릎을 쳤다. 그리고는 두 번 외쳤다.
위태롭구나, 위태롭구나.
제선왕은 종리춘에게 그 뜻을 설명해 보라고 했다.
눈을 치켜뜬 것은 적이 쳐들어와 봉홧불이 오르는 것을 본다는 뜻입니다. 이를 보인 것은 신하가 올바른 말하는 것을 가로막는 왕의 입을 벌준다는 뜻입니다. 두 손을 들어올린 것은 입에 발린 아첨이나 하는 간신들을 물리친다는 뜻입니다. 손으로 무릎을 친 것은 매일같이 잔치나 벌이는 이 설궁을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다른 나라는 임금이 나라 다스리는 일에 힘써 나라가 부강해졌고 제나라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제선왕은 잔치나 즐기고 간신들의 말만 듣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제나라는 지금 쌓아놓은 계란처럼 위험하다고 말했다.
저는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의 말을 듣고 임금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신다면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자 제선왕이 깜짝 놀라며 종리춘을 일으켰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 허물이 무엇인지 영영 모를 뻔 했다.
제선왕은 즉시 잔치를 끝내라고 한 다음 종리춘을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리춘을 비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종리춘은 사양했다.
임금께서는 저의 말은 듣지 않으시고 저의 몸만 왕비로 삼으려 하십니까? 먼저 나라 다스리는 일을 잘 하시고 현명한 사람들을 뽑으십시오.
그 후로 제선왕은 종리춘의 말대로 나라 다스리는 일에 힘쓰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은 내쫓았다. 그 자리에 현명한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 사람들 중에 맹자(孟子)가 있었다. 그래서 나라는 다시 잘 다스려졌다.
제선왕은 그런 후에 종리춘을 왕비로 삼았으며다. 그녀에게 무염군(無鹽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는 외모보다는 현명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