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

최천호
  • 1157
  • 2020-05-08 20:53:09
아들에게

손을 잡고
네 걸음에 맞춰
걸었었는데

이제는 뒤에 서서
너를 본다

빨리 가려 하지 말고
바르게 가거라
힘들 때도
어깨를 펴거라
갈 길이 머니
서둘지도 말라

이제는 뒤에 서서
너를 본다



그리움이 가득한 아침

꿈속에서야 가본 고향 집
처마 밑에 누렁이는 깊이 잠들고
마당 가득한 가을볕에
붉은 고추 몸을 말리는데
안방 문은 굳게 닫혀
아버지는 기척이 없네



고향의 봄

한 아이가
목까지 차오른 숨을
키 작은 소나무 숲
뒷동산에 토해내며
한달음에 오르던
그 심장 소리로
어디론가 끝도 없이
가보고 싶었던 봄날

두 손에 가득한
붉은 진달래처럼
나누고 싶었던 사랑
수줍게 돋아나는
여린 눈물 같은
순결한 봄날

싱싱하게 젊은
나의 어머니,
꽃향기 날리던
아름답기만 하던
나의 어머니



봄날의 회상

꽃이 피어나는
저 산모퉁이를 길게 돌며
소를 몰던 아버지는
이 진달래를 보았을까

논둑길을 내달려
단숨에 올라온 뒷동산,
거울 같은 무논에
긴 줄을 그으시는 아버지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사랑을 주고받던 이 꽃길을
누구와 걸어 보았을까

청청한 저 산은
올해도 여전하게
붉은 가슴을 들어내어
나를 울리고 말 것인데



보릿고개

삼일을 금식하니
일곱 살
어린 아버지 모습이
그려지네

늦은 저녁
길 건너 집의
밥사발 긁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을까

개구리 우는 무논에
둥근달은 깊게 누웠는데
수줍은 아카시아
허연 가슴 늘어트리고
깊은 밤을 새우자하네

맑고 고요한 아버지 내음



군불

아버지는
어둠이 물러설 줄 모르는
겨울 새벽에
청솔가지를 꺾어
불을 밝혀
동녘에서 떠오르는
태양보다 더 뜨거운
아침을 만드셨다



아버지

도시에서 달려 나온 신작로
작은 마당가에 미루나무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서 있었다.

뜨거운 여름 오후 내내
태양을 머리에 이고
그림자로 서서
소나기가 지나가면
땀내 진하던 온 몸을 씻고
하늬바람이 부는 하교 길을
내려다보며 손뼉을 쳐주었다.

수십 번의 태풍에도
몸을 숙여 자리를 지켰는데
도시가 밀려 나오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감동도 의미도 없는
간판들만 즐비하다



엄마 어-엄마

구십이 다 되서 받은
생의 유일한 자격증
치매로 인한 요양보호 삼 급
열일곱에 시집와서
여섯 번 강산이 변하도록
함께 살다 먼저 가신 남편
이름도 모른다 하네

가을은 서늘한 바람으로
문턱을 넘는데
저녁 늦도록
아파트 창문을 열고 서서
먼 곳만 바라보는 엄마는
지워져버린 기억에서
남편을 기다림인가
두고 온 고향
푸른 바다가 그리움인가

가로등 불빛이 힘을 얻어
그림자가 짙어지고
층층마다 창문들의 불빛은
온기를 피워내는데

엄마, 어-엄마,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곱디고운 우리 엄마



장마

할 일이 없다며 눈을 감고
새김질만하는 누런 소 등 뒤로
바람도 없는 늦은 오후는
지친 듯이 늦은 걸음이다

갈매기 무리들은
수평선을 볼 수 없었다며
종일 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해당화는 벌써졌지만 열매는
붉은 색을 내지 못하고 있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한 달 내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하얀 소금을 먹고 사는
염전 창고는
검게 타들어가는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데
아버지는 허리 굽은 황새처럼
누렇게 바랜 등만 보인 채
널따란 논을
두 손으로 휘저으며
길게 자란 풀들을 뽑아
멀어진 둑에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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