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인 줄 아는 탕자

최세창
  • 1496
  • 2020-05-20 03:24:20
(설교 동영상은 유튜브에)

1. 시작하는 말

의인인 줄 착각하는 탕자가 많이 있습니다. 탕자보다 좀 나은 점들이 있다고 해서, 의인인 줄 착각하는 탕자도 많이 있습니다. 지식이나 권세나 돈이 많다고 해서, 남들보다 잘난 줄 아는 탕자도 많이 있습니다. 십 여 년 전에, 공산국가인 중국에서는 남들보다 더 출세한 고급 관리가 거짓과 비리와 뇌물 수수와 음행을 일삼는 등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사형당했습니다. 그의 신분은 지성적인 고급 관리이나, 실은 탕자였습니다.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면서 나랏돈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독재자와 공산 독재자들은 통치자의 신분이었으나, 실은 탕자들이었습니다. 겉 신분은 대단하나, 속사람은 탕자인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2. 의인인 줄 착각하는 탕자인 맏아들

탕자인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고,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맏아들은 은혜로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종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웃들까지 기뻐 노래하며 춤추며 먹고 마시는 잔치가 벌어졌는데도, 맏아들에게 소식을 전해 준 종이나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맏아들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집 가까이 온 맏아들은 한 종을 불러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서둘러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아버지에게 묻지도 않은 것을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효자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지혜롭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집에 영문 모를 잔치가 벌어졌으면,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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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테 질문해야 합니까? 부모나 가장인 아버지에게 질문해야지, 종에게 질문하면 어떡합니까? 제삼자인 남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모르는 일이나 문제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의 말을 들어야 하고, 여의찮으면 남의 말이 아니라, 남들의 말을 듣고 종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말을 듣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말 자체를 이해하고 판단하기에 앞서, 말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감안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질문을 들은 종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종은 주인의 맏아들에게 상황 설명을 하면서 ‘작은 도련님’ 대신에 ‘당신의 동생’이라고 표현하고, ‘주인님’ 대신에 ‘당신의 아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은 가족애가 없는 맏아들을 의식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바로 당신과 피를 나눈 당신의 동생이고, 너무나 기뻐서 잔치를 벌인 사람은 바로 당신을 낳아 기른 당신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 종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하고 설명했어야 하는데 못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을 위해 축하 잔치를 벌이는 주인인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어느 정도나마 설명했어야 합니다. 실은, 그 종 역시 주인의 처사를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굶주리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에 대해 건강한 몸이라고 하고, 염소 새끼가 아닌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종의 설명은, 고의든지 과실이든지 간에, 맏아들의 뒤틀린 감정에 불지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공통적인 본질이 피조성과 죄성, 가능성과 유한성, 자율성과 제한성, 상대성과 불완전성, 나약성과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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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임을 알고, 아버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매사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와 목적이 되는 언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의 설명을 들은 맏아들의 반응은, 자신이 탕자임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사람이란 속 생긴 것을 감추지 못하고, 속 생긴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말씀 착념과 순종으로 잘 만들어 가야 합니다. 물론, 맏아들은 동생과 재산을 물려받은 후에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허랑방탕하지도 않았고, 인생 밑바닥에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계속해서 아버지와 함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인 같은 탕자였습니다.
첫째, 맏아들은 집을 나간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는커녕, 노하여 잔치가 벌어진 집에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했습니다. “노하여”의 헬라어 오르기스테(ὀργίσθη)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깊은 노여움’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노여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것이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는 아버지, 특히 동생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건강하게 돌아온 동생과 기뻐하며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 대해 기뻐하며 감사하는 대신에, 노하여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한 명의 탕자가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맏아들은 평소에도 못마땅했던 동생이 거지꼴이 된 것이 아니라, 돌아온 것에 격노했습니다. 그를 위해 잔치를 벌인 아버지에 대해 격노했습니다. 집안의 재산 중 일부가 동생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격노했습니다.
맏아들의 분노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가 일부러 나와서 집에 들어가 동생을 맞아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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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자리에 참석하자고 권했지만, 아버지에게 순종하기는커녕 나무라며 따졌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 대해 완전한 사랑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맏아들에 대해서도 같은 사랑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라고 불평했습니다. 맏아들은, 방탕한 생활로 망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동생과 달리, 아직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라고 했는데, 참 기막힌 말입니다. “섬겨”의 헬라어 둘류오(δουλεύω)는 ‘종처럼 일하다’라는 뜻입니다. 맏아들 자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아버지를 공경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는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품삯을 받고 일하는 품꾼으로도 생각하지 않았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종으로 생각해 온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아들이 아닌 종으로서 아버지의 명령을 어김이 없이 복종해 왔다는 겁니다. 그런 그의 불평과 원망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는 친구들과 즐기도록 염소 새끼조차 주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살진 송아지와 염소 새끼를 대비시킴으로써, 동생이 환영받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셋째, 맏아들은 회개하여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의 재산을 방탕한 생활로 날려 버린 탕자로만 여겼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는 비난은, 실상 맏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악의적인 단언입니다. 집을 나간 동생을 찾아보지도 않은 그가, 동생이 물려받은 유산을 사업하다가 탕진했는지, 사기를 당해 탕진했는지, 감투를 위한 뇌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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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진했는지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는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이 아들”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싸잡아 경멸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탕자이고, 아버지는 불의하고 불공정한 처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르면서 정의의 사자인양 착각하는 자칭 의인들이 많습니다. ‘내로남불’ 정도가 아니라, ‘내선남악’의 의식에 물든 사람들도 많습니다.
디모데전서 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친족, 특히 가족을 거짓과 위선, 몰염치와 비리, 불공정과 부정의 삶이 아니라, 정직과 양선, 염치와 도리, 공정과 정의의 삶을 살도록 돌아보는 사랑을 잘해야 합니다.
맏아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자신이 탕자임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은 모르고, 자기 의에 빠져서 맞지도 않는 정의 의식만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정의의 화신인양 설치는 사람치고, 불의한 이익을 안 챙기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 적임자라고 자만하는 사람치고, 자신과 가족과 자파의 불공정한 탐욕을 안 챙기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자기 의와 자기 이념만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다 비방과 척결 대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즉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깊고 무한한 사랑이 있는 아버지의 생각과 판단은, 맏아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3. 맺음말

의인인 줄 착각하는 탕자들과 탕자보다 좀 나은 점들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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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의인인 줄 착각하는 탕자가 많이 있습니다. 지식이나 권세나 돈이 많다고 해서, 남들보다 잘난 줄 아는 탕자도 많이 있습니다. 겉은 멀끔하나 속은 거짓과 위선, 비리와 몰염치, 부정과 무법으로 얼룩진 탕자가 많이 있습니다. 모두 다 속히 회개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회개하여 돌아온 둘째 아들인 이방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고, 맏아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버지께 살았으나 죽은 아들이며 얻었으나 잃은 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이신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신을 잘 만들고, 가정을 잘 돌아보고, 사랑이 동기와 목적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설교의 성경 본문: 누가복음 15:25-32)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전체 주석/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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