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와 게르니카(학살)

임재학
  • 1707
  • 2020-06-12 09:55:55
* 게르니카 1937. 마드리드 국립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y Picasso,1881-1973) 는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말할 수 없는 대가이다.

흔히 20세기의 문화를 말하면서
정신혁명은 지그문트 프로이드,
과학혁명은 아인슈타인,
미술혁명은 야수파 앙리 마티스와 입체파 파블로 피카소,
패션혁명은 가브리엘 샤넬,
건축 혁명은 르 코르뷔지에 라고 정의한다.
(물론 순전히 주관적 정의이다)

현대 사회의 문맹은 글을 못 읽는게 아니라 이미지를 못 읽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이렇게 20세기 이전은 보이는 세상을 탐구하고 재현했다면
20세기 이후론 보이지 않는 세상을 탐구하고 재현한다.
그렇기에 피카소를 건너뛰고 20세기를 이해하긴 어렵다.

피카소는 그의 나이 20살이 되기 전에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천재였다.
하지만 이미 사진이 나오고 영화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20세기에
더이상 고전적인 의미의 그림은 그를 만족시킬수 없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평생이 걸렸습니다" (피카소)


1937년 4월26일 오후4시30분경 스페인북부 바스코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에 폭탄이 떨어진다.
프랑코 독재를 반대하고 공화파를 지지했던 바스코 지방에 대한 히틀러가 보낸 최신기종의 전투기 폭격이었다.
이 사건으로 작은 마을 게르니카는 이틀 내내 불탔고, 1,5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인구의 2/3가 사망 하거나 부상당했다.

당시 56세인 피카소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왜냐하면 이는 전쟁 중에 있었던 폭격이 아닌 비무장인 민간인들에게 행한 폭격이었기에 글자 그대로 학살이었다.
그는 이 만행을 고발하고자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높이 3.5미터, 너비 7.8미터의 거대한 벽화를 그린다.
당시에 사진, 영화, 다큐멘터리 같은 새로운 매체들도 다수 전시됐지만
파카소는 가장 고전적인 방식인 회화로 이 추악한 민간인 학살을 고발했다.

게르니카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 자체로 살아남은 생존자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일어난 참상을 그렸다.
그러나 이름이 게르니카일뿐, 오늘도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어떤 도시, 어떤 장소라도 될 수 있다.
그는 인류사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에 대한 고발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그래서 피카소는 이 그림을 흑백으로 그렸을 것이리라.
그리고 이 그림 이후로 독재자 프랑코와 불화하고 망명자로 떠돌게 되고,
죽을 때까지 고국 스페인에 돌아갈 수 없게 된다.

* 게르니카 그림에 대한 전이해나 설명이 전혀 없는
유치원 아이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다.
   아이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슬퍼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웬지 눈물이 나요" 였다.
    피카소는 역시 천재화가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모든 전쟁과 학살은 슬픈 것이다.

* 우리나라에선(1969년)  당시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던 학용품인 '피카소크레파스', '피카소물감'이 있었다.
피카소를 학용품 이름으로 썼다고 정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학용품공장 사장이 반공법에 걸려서 곤욕을 치룬
웃지 못할 헤프닝도 있었다.

지금 보면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가?
아마 오늘 일어난 감게의 학살도 시간이 지나고 이 사태가 해결되고 나서 다시보면
또하나의 부끄럽고 유치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상하게 흑백의 무거운 그림 '게르니카'가 유난히 생각나고 한숨짓게 만드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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