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본부의 불의함 4. 한 사람

박온순
  • 2446
  • 2020-06-26 21:23:53
공적인 공간(감리회 게시판)에 글을 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대면을 하면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뱉은 것은 소수의 사람의 마음에 심어지고 공중에 날아가지만 게시판에 기록된 것은 여러 증인들이 있어 그 파장은 그야말로 일파만파입니다. 그러하기에 저의 경우 어떤 사건을 공론화 하고자 할 때는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시행합니다.

1. 근거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곤 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이 말씀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그 일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은 잘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게 된 경우 침묵하며 방조하여야 하는지, 드러내야 하는지 드러내지 않고 당사자들과 해결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고 조용히 해결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은 경우에는 그 일로 인하여 더 기도와 묵상을 하며 주님의 뜻을 구한 후 침묵함으로 예견된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갖게 됩니다.

2. 상태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마음의 상태를 점검해 봅니다.
혹여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살인적인 분노나 미움은 없는지, 또는 극심한 정죄 감으로 피조물의 자리를 이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속에 지은 은밀한 죄는 없었는지(없는지)를 살펴봅니다. 어느 한 편으로라도 거리낌이 있을 때는 아무리 선한 일인 것 같아도 침묵하거나 모든 행동에 멈춤의 시간을 갖습니다. 기록된 말씀에 조명해 볼 때 그 일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3:13-16)

3. 열매

어떤 일을 행하므로 현재 주님과의 교제는 어떠한가를 점검해 봅니다. 그 일을 행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품과 권능을 여전히 경험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은 고백이 심중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올 때 행하곤 합니다.

“아,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구로 주님이 하시는 일이구나. 때마다 도우시고 만날 자를 만나게 하시니, 주님은 멀리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그 지혜와 권능으로서 친히 행하시는구나!”

특히 주님이 맡기신 목양지가 방해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현재 맡기신 주님의 양들의 영혼을 소홀히 하며 지금까지 해왔던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라든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든가, 기도가 막힌다든가, 목회에 지장을 받는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이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를 여쭈어 봅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는데도 조급한 마음에 앞서 나가는 것은 내 생각과 의를 주장하는 것일 수 있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귀한 시간을 허비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4. 가슴 설레는 일

어제는 너무도 가슴 설레는 일이 있었습니다. 십 수 년 전에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면서 복음도 듣고 세례도 받고 열심을 다해 섬기던 중 남편의 직장을 따라 멀리 이사했던 자매가 몇 해 전 서울로 상경한 후 대형교회에 다닌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지난주일 예배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 집사님을 안내한 권사님을 통해 이유를 들어보니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 00집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영혼이 너무 곤고하여 우리 교회에 와 보고 싶다, 그동안 믿음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몇 해 목사님께 배운 말씀으로 견뎠는데 이제 바닥이 났다”는 소식과 함께 지난 주일에 예배에 참석한 것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리나 눈물을 훔치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럽던 지요.

그런데 어제 오전에 문자가 왔습니다. 1:1 양육을 하기로 한 시간에 다른 한 사람을 데리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오후 세시에 만나서 성경공부하기로 하였는데 오전에 연락을 받은 시간부터 오후 세시까지 제 가슴이 얼마나 설레는지 마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가 연상되는 듯 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1:41-42)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성전을 찾아올 성도들을 생각하니 얼마나 가슴이 설레고 행복한지 “천국에서 살게 될 삶이 이러할까?”라는 생각과 함께 제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 마음은 맛본 자 만이 알 것입니다. 점심 식사를 하는 중에도 거리를 거니는 중에도 기도하였습니다.

“누굴까?”, “주여, 그 시간에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셔서 말씀을 가르칠 때 진리의 성령님으로 그들의 영혼도 충만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약속시간이 되어 등장한 영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역시 우리교회에서 세례도 받고 14년 전에 집사 직분을 받았으나 돈 버는 세상 재미에 푹 빠져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지 않던 잃어버린 영혼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할렐루야!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며 거리에 나가 복되신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보다 더 즐겁고 기쁜 일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5. 가슴 아픈 일

그러나 이즈음 위와 같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더 좋은 일에 그 맛을 보며 더 바랄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또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마음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본 게시판에 명덕학사 건으로 인하여 본부에 들고 나며 경험한 이야기들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때문입니다. 특히 3회 차 쓴 글 [감리회 본부의 불의함 3. 반응들]에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하여 피력하고 나니 더욱 그러합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문제를 세상에 떠들며 해결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마귀요, 죄인데 세상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고자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침묵하지 않고 본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쇠락해 가는 이 땅의 교회와 대한민국을 살리시기 위해 찾으시는 “한 사람”, “진리와 공의를 구하여 찾는 그 한 사람”이 그 어딘가에 있어 명덕학사 건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약속대로, 상식대로, 해결해줄 준비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아직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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