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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인 이승만
함창석
- 202
- 2025-08-18 20:32:37
함창석
이승만은 감리교인이며 대한민국의 초대, 2대,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개항기부터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으로 미국 유학 후 외교 독립 노선을 주장하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1945년 8월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주요 업적으로 독립운동인데 개항기 독립협회 활동, 미국 망명 후 외교 독립 노선 주장,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및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 경제 발전으로 농지개혁을 통해 토지 소유관계를 개선하고, 경제 개발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교육 진흥으로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고 6년 의무교육 시설 확충에 힘썼다. 반공 노선으로 강력한 반공 정책을 추진하여 냉전 시대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강화하였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했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하였다. 1952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 다시는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모두 존재하며, 그의 업적과 과오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1912년 4월 10일, 요코하마를 출발, 4월 25일 캐나다, 4월 26일 시애틀을 거쳐 1912년 5월 1일, 미니애폴리스에서 4년마다 열리는 '국제기독교감리회총회'에 참석하였다. 1912년 4월 10일, 일본에서 배를 타고 미주로 갈 때 동행한 감리교 메리만 해리스(Merriman C. Harris) 감독과 일본의 조선 통치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다. 이승만은 그 문제에 대하여 여러 기독교인들과 자주 토론하였으나, 그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또한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도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는 한국의 정치와 종교상의 사태에 대해서 여러 차례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승만은 1912년 5월 1일, 이 회의 석상에서 요코하마를 떠나기 전, 일본 목사가 찾아와 반일적 언사를 삼가라고 했던 경고를 무시한 채, 발언을 하였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 집필에 몰두하였고 1913년 3월, 이를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1913년 8월,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한인기숙학교를 곧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후에 이승만과 미국 감리교 선교부(American Methodist Episcopal Mission) 사이에는 교육방침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즉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한인학생들을 하와이사회에 완전히 동화시켜 미국인화(americanization) 시키려고 했던 반면, 이승만은 한인 학생들에게 한국말, 한국역사, 한국관습을 가르쳐, 장차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공헌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기를 원했다. 1914년,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방침에 반발하여 한인중앙학원 원장직을 사임하였다. 현대의 기독교 또는 기독교 우파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평가와는 달리, 근현대의 기독교 세력은 항일독립운동과 반공운동을 주도하고 유교적 사회분위기에 변화를 주는 등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이승만, 김구, 유관순, 안창호 등 한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또 프란체스카 일기에 기록된 일화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신심은 꽤 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학자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 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