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적 발성]의 잘못된 설교들

한만경
  • 61
  • 2025-09-22 12:31:31
■ [파시즘적 발성]의 잘못된 설교들

아주 오래 전부터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면, 간간히 시간이 날 때마다 동기분들의 주일예배 설교 동영상을 시청해 본다

지난 주일에 있었던 각각의 선교사역의 장에서 선포되어졌던 말씀들을 대하면서 설교자와의 내면의 영적인 접촉과 교제도 생각으로 만들어낸다.

그런데 아주 가끔은 특별한 외형적 설교를 선포하는 듯한 강단을 개인적으로 느끼면서 갖게된 단어와 소회가 있었다.


[파시즘(Fascism)]. 이 말은 이탈리아어 fascio(묶음, 다발, 연합)에서 왔고, 이 단어는 고대 로마의 권위와 힘을 상징한 집정관의 [fasces]에서 유래되었다.

[fasces]는 고대 로마에서 집정관(liktor, 집행관)이 들고 다니던 막대기를 묶은 다발 속에 도끼가 꽂힌 상징물로 이는 권위, 단결, 처벌과 생명권을 행사할 권력을 나타내고 있다.

“많은 막대기는 부러뜨릴 수 없으니 뭉치면 강하다”라는 상징으로 [fasces]는 권위(권력)+단결(집단적 힘)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품고 있다.

그후, 1919년 이탈리아에서 공식적인 정치 운동 명칭으로 처음 등장했고, 이후 1920년대 무솔리니 집권과 함께 국제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파시즘은 언어학이나 정치학의 정식 개념이라기보다는, 주로 비유적·비판적 표현의 어떤 말하기 방식을 표현 할 때 “파시즘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파시즘(fascism)은 권위주의, 강압, 획일성, 강자의 지배를 상징하면서 “파시즘적 발성”이란 말투나 발화 방식이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며, 타인의 다양성과 자유를 억누르는 말하기 방식을 가리키고 있다.

상대를 대화 상대로 존중하지 않고 명령조, 단정조, 절대적 어조로 말하는 방식,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고 ‘내 말이 곧 진리다’라는 언어적 태도와 함께 설득보다는 억압과 강압으로 상대를 침묵하게 만드는 발화 방법이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현대의 신화(Mythologies)』라는 책에서 “파시즘이란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고 언어와 연결시켜 설명한 바 있다.

즉, [파시즘적 발성]이란 다양한 언어 가능성을 봉쇄하고, 단일한 발화만 강요하는 말하기로 이해될 수 있다.

정치적 집단 내에서 “이견을 억누르고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던지, 문화·예술 영역에서 “유일한 해석, 유일한 방식”만을 허용하는 태도의 비판을 금지하려는 행위 등 [파시즘적 발성]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파시즘적 발성]은 단순히 큰 소리로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기 자체가 권위적이고 강압적이며, 다양성과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방식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권위를 빌려, 다른 해석이나 다른 성도들의 경험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설교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이 말씀이 곧 절대적이니 무조건 이렇게 살아라” 라고만 외치면서, 성도들이 질문하거나 고민하는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이대로 안 하면 불순종이다”는 식의 권위주의적 설교를 하고 있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다른 시각을 나눌 때, “그건 틀렸다. 목사가 말하는 해석만 맞다”라고 단정하면서 교회 안의 대화와 토론이 차단되고, 결국 성도들은 침묵하거나 수동적으로 따르도록만 만들기도 한다.


신앙생활은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새벽기도 안 나오면 믿음 없는 사람, 찬양 크게 안하면 은혜 못 받은 사람 등 특정한 방식만을 강요하며 “이게 진짜 신앙이다”라고 규정하는 신앙적 획일 태도를 강요하는 강단도 많이 있다.

분명한것은 설교는 권위적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의 삶을 연결해주는 해석학적 대화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파시즘적 발성]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설교자가 먼저 성도들의 삶의 언어를 귀 기울여 들어야하며, 설교가 억압이 아니라 공명(resonance)이라는 경청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스스로가 모든 답을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다시 질문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기는 설교를 선포해야 한다.

복음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능력(고후 3:17)입니다. 설교는 성도를 묶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유 안으로 초대하는 말이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교회가 불안정하고 위기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파선되고 있는 배 같은 느낌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시대적 사고을 반영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행하고있는 연례행사, 행위적인 관객의 관찰자로서 참여하는 예배와 모임들...그 위로 쏟아지는 구약, 신약의 역사 이야기속의 교훈을 억지로 찾아 책임과 의무로 부여해주는 순례자 고난의 역정등이 만연된 곳.

JW(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신천지예수교, 예수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등등, 이들의 건물 앞 도로에 빽빽하게 주차된 차량들을 보면서, 왜? 그곳에 청맹과니 같은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몰릴까? 너무도 궁금하다.

"~설교 말씀이 달라요, 설교 말씀을 받고 힘을 얻습니다."라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듯한 그 곳 교인?들의 신나는 얼굴이 불현듯 떠오른다.

"여러분의 교회, 성도님들도 그렇게 행복하신가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요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듣고 해석하는 동행자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다양성 안에서, 말씀은 억압이 아니라 해방으로, 침묵이 아니라 생명의 대화로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복음 파이터 : 한만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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