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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9:19-23(자유: 복음 선교를 위한 종노릇)의 주경신학적 연구
최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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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8 14:56:30
이 부분은 【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로 시작되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는 9:1의 주석을 보라. 더욱이, 바울은 당시에 대단히 많은 특권이 보장된 로마 시민권까지 있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즉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참조: 막 10:43-45, 눅 22:26-27). 그리스도의 종(롬 1:1, 갈 1:10, 빌 1:1)인 바울은 또한 사람들의 종도 되었다(고후 4:5). 그는 부양받을 권리만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의 생 전체를 포기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랑의 종노릇을 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어드만(C. R. Erdman)은 “바울은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이상적인 권리를 포기하고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만한 가능성이 보여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온갖 필요한 양보를 서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바울은 보다 구체적으로,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는, 바리새인이요 랍비였으나①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목적으로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바울은 유대인들 때문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고(행 16:3), 서원한 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으며(행 18:18), 유대인의 습관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머리를 깎기도 하였다(행 21:17-29).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죄악이 아닌 유대인들의 풍습과 전통에 국한된 것으로 복음 선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의 그러한 선교 동기에 대해, 內村鑑三은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의 깊은 동정에 의하는 것이다.…참된 동정은 자기를 타인의 입장에 두는 일이다. 자기를 잊어버리고서 그(사람)처럼 되는 일이다.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 사람처럼 느끼고, 그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를 이해하고, 그를 돕고, 그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에게 이 종류의 깊은 동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전도의 대성공을 올렸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의 선교 방법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선교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위선적으로 두 얼굴을 갖는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방법은, 요즈음 말로, 누구하고도 어울릴 수 있는 경우이다. 자기의 견해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전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나, 동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나, 남의 정신과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는 사람 등은 결코 목사나 전도자가 될 수 없으며, 심지어 벗도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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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 K. Barrett는 “최근의 연구가 강조한 바대로 여러 면에서 바울로는 단순히 유다인이 아니라 바리사이인이요 라삐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또 중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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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그런 식으로 선교한 것은 어디까지나 각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전통이나 풍습이 구원의 도에 지장을 초래할 경우에는 단호하게 배격하였다. 그 좋은 예로 예루살렘에서 함께 있던 헬라인 디도에게 단호하게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한 사건을 들 수 있다(갈 2:3-4).
바울은 그러한 취지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한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에 대해 (1) 앞의 “유대인”을 반복 강조한 것이라는 설,② (2) 교인이라도 모세 율법의 의식적 법규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교인들이라는 설(박윤선), (3) 유대인을 종교적으로 표시한 것이라는 설,③ (4) 엄격하게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들이라는 설(Lightfoot, Thomas),④ (5)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라는 설⑤ 등이 있다.
여기서는 굳이 반복 강조할 필요가 없으므로 (1)설과 (3)설은 적합하지 않고, 선교에 관한 것이므로 (2)설도 적합하지 않다. 전후 문맥상 (4)설보다는 (5)설이 더 적합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롬 10:4)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처럼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었다(롬 6:14).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자들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게 할 목적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되어 율법을 지켰다.
바울은 같은 취지에서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하였다.
율법 없는 자는 토이스 아노모이스(τοίς ἀνόμοις)로서 불법한 자들로도 번역되나(살후 2:8, 딤전 1:9), 여기서는 모세의 율법이 없는 자들 곧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들과 달리, 바울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앞 구절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단순히 율법 아래 곧 율법에 얽매여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데 비해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 있는 자(ἔν νομος χριστού)를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율법 안에 거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초월하여 그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율법인 사랑의 새 계명(요 13:34, 15:10, 롬 13:10, 갈 5:14)과 연합한 자였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처럼 힘겨울 정도로 부담스런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실행될 수 있는 사랑의 법이다(롬 5:5).
아무튼, 바울은 율법 없는 자들인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 그러한 실례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갈 4:12. 참조: 2:11-14)에도 나타나 있다. 또,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 그는 이방 세계의 언어, 문화, 철학, 종교, 그리고 생활양식, 풍습 등에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선교 활동 및 문서 작성에 적절하게 사용하였다(9:24, 행 17:22-23, 롬 1:18-, 9:16, 갈 2:2, 빌 2:16, 3:12-14, 살후 3:1, 딤후 2:5, 4:7 등).
바울은 앞과 같은 취지에서, 【22】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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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 Alford, A. Barnes, N. Hillyer, W. H. Mare.
3) “Theodoret, Vincent”(in 이상근), R. C. H. Lenski, 黑崎幸吉.
4) in 이상근.
5) “Godet”(in 이상근), C. Hodge, T. T. Shore, A. Robertson and A. Plummer, 김용옥,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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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들은 “8:7-13에 언급된 믿음이 약한 사람들과 하임의 주장에 따라 로마서 5:6에 비추어서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비그리스도교인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⑥
바울이 약한 자와 같이 된 목적은, 전자에 대해서는 바른 영적 지식을 갖추어 강하고 담대한 성도가 되게 하려는 것이고, 후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약한 자가 아니었지만, 믿는 사람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그들의 약한 처지와 약한 마음들에 대해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여 동정하고 이해하면서 그들과 보조를 맞추었다. 그는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29-30)라고 하였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롬 14:1-2)라고 하였으며,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8:13)라고까지 하였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요약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τοὶς πάσιν γέγονα τὰ πάντα)은 직역하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이다. 즉,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몇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자유자재로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확고하게 무장되었기 때문에 복음 전파를 위해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적응할 수가 있었다. 그 복음은 만 가지 머리를 소유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선교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대상자들과 같이 될 수 있는 복음적 사랑과 이해와 동정이다.
자신의 권리 유보와 자기 부정의 목적이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온 바울은,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와 자신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염원을 피력하고 있다.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내가 ‘복음’(4:15의 주석을 보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의 위하여가 원문에는 διὰ(디아: ‘말미암아’, ‘통하여’)로 되어 있으므로, 정확한 번역은 ‘내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행함은’이다. 즉, 바울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복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도 복음에 참예하고자 하였다. 이 말은 “복음과 함께하는 동역자나 복음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에(복음의 축복에) 참여함을 뜻하는 것이다”(C. K. Barrett).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9:27)라고 하여, 이미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되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아직 완전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점과 도중에 버림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고 권면하였다. 물론, 그러한 행동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하며, 육체의 소욕을 좇아서는 안 된다(갈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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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in C. K. B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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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출처: 최세창, 고린도전서(서울: 글벗사, 2001, 2판 1쇄), pp. 263-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