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기사] "노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됐어요"
선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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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3 17:18:09
인기스타 ‘와일드캣츠’에서 전도왕으로 변신한 이용순 권사(부광교회)
2008년 02월 19일 (화) 윤선주 기자 sun@kmctimes.com
“마음 약해서 잡지 못 했네~ 돌아서는 그 사람 짜라라짜짜짜~”
할아버지의 어깨도 들썩이게 했던 ‘텔~미 텔~미 테테테테텔~미’가 2007년을 휩쓸었다면, 1980년대 초에는 와일드캣츠의 ‘마음 약해서’가 ‘국민 애창곡’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와일드캣츠의 여성 보컬로 새침한 외모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기억되는 ‘지윤경’. 왕년의 인기스타였던 ‘지윤경’이라는 이름 대신 ‘이용순’이란 본명을 되찾은 그녀는, 연예활동을 하던 30여 년 전보다 더 바쁜 스케쥴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부광교회의 ‘전도왕’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이용순 권사. 목장예배를 인도하고 나선 그녀를 지난 14일 교회에서 만나봤다.
노래 없인 난 못살아~
“용순아, 넌 꼭 가수돼야 해. 다른 일 하면 안 된다!”
▲ 지난 14일 부광교회서 만난 이용순 권사는 2명의 태신자를 인도하기 위한 '전도 작전'에 흠뻑 빠져있었다.
소녀 용순이에게 어른들은 콕 찍어 ‘가수’가 되라고 말했다. 영어 알파벳도 모를법한 어린 아이가 흐드러지게 부르는 팝송은, 기특함을 넘어 신기하게까지 느껴졌던 모양이다.
도저히 어린 아이의 노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소녀의 노래에는 필(feel)과 기교가 흘러 넘쳤다.
어려서부터 이용순 권사는 노래를 끼고, 노래를 안고, 노래와 함께 살았다. 오빠가 듣던 라디오 AFK에 주파수를 맞추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대로 외워버렸다.
물론 뜻을 알리도 없었거니와 그게 무슨 장르인지도, 가수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냥 노래를 부르면 행복했고, 그가 부르는 노래에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즐거웠다.
중학교 시절에는 매번 교무실에 초청(?)을 받아 선생님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지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노래자랑에 출전해 열이면 열, 상을 받아 오기도 했다.
가수의 길이 열리다
8남매 가운데 5째. 포천지역의 유지였던 부모님 덕분에 생활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대학 진학은 역시나 무리였다. 물론 노래에 빠져 살던 그녀에게 대학은 대수가 아니었다.
이때 미8군 밴드에서 노래를 하던 오빠를 통해 가수의 길이 열리게 됐다. 일찍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오빠가 미8군 그룹사운드(Star Page)의 보컬 자리를 마련해 준 것. 이 일을 시작으로 정성조 악단, 이인표 악단 등 유명 밴드에서 보컬을 맡아 가수의 역량을 쌓아간다.
그러던 중 차기 멤버를 뽑던 와일드캣츠의 매니저가 그녀를 오디션 보기 위해 찾아왔다. 단 몇 소절만 불렀을 뿐인데 매니저는 ‘오케이’ 사인을 했다. 당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와일드캣츠의 멤버가 된 이후, 그녀는 팀의 인기를 따라 밤낮 없이 무대에 올라야 했다.
“어려서부터 저는 부르기 어려운 노래를 좋아했대요. 그래서 와일드캣츠 시절에는 트롯트 풍의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게 얼마나 창피했는지 몰라요. 물론 제 얼굴을 알리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됐지만 제가 추구하는 음악세계는 아니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기 좋아했던 그녀였지만, 무대에 오르는 시간을 제외한 연예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 불규칙한 생활 패턴은 둘째치더라도 연예계에 만연해있는 복잡한 사생활은 ‘시골처녀’ 이용순에게 불편하고 낯설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멤버들은 ‘이상한 애’라고 놀릴 정도였다.
그러다 뜻이 맞는 이들과 ‘젊은 연인들’을 구성, ‘젊은날의 초상’이란 곡으로 종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때 ‘사랑과 평화’의 창립멤버 허경 씨를 만나 그의 음악성에 반한 그녀는 가수 활동을 접고 한 남자의 아내로 또 다른 인생길을 시작했다.
남편도, 형제도 모두가 미워
결혼 후 바로 아들 단이를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린 이용순 권사. 하지만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빚더미에 앉게 된 후 고된 시간이 찾아왔다.
“평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싫어해 친정에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안했어요. 그러면서도 도와주지 않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미워하게 됐고, 살기 위해 다시 무대에 서게 되면서 남편을 향한 증오가 생겨나게 됐어요.”
옛 인기를 등에 얻고 다시금 무대에 오른 가수 이용순. 녹슬지 않은 노래 솜씨로 매니저를 둬야 할 만큼 그의 목소리를 찾는 이들이 많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노래한다는 사실 자체를 그녀는 용납할 수 없었다. 노래를 ‘밥벌이’로 부르는 그 상황이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고, 초라함과 좌절감까지 느끼게 했다. 그 마음은 이러한 상황을 만든 남편에게 상처가 되어 쏟아지기도 했고, 형제와의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붙든 것은 이웃 친구의 전도였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된 후 졸곧 주일을 놓치지 않았고, 전직 가수란 후광에 자연스럽게 찬양대에도 서게 됐다. 나무랄 데 없이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여선교회 회원들과 어울리는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거북스럽기만 했다.
“그때는 왜 이렇게 주일이 빨리 돌아오던지…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 탓에 교회생활도 최선을 다했지만 ‘선데이 크리스찬’일 뿐이었어요. 그러다 요한계시록의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면 내가 뱉어버리겠다’는 말씀을 들은 후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하나님께 죽기 살기로 매달리기로 작정했어요. 그 마음을 먹은 뒤 기도를 하던 중 터진 눈물이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흘러 내리더라구요.”
‘그릇’으로 빚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 성령을 체험한 이용순 권사. 형제를 미워했던 일, 남편에게 상처 주었던 일, 현실을 비관하고 좌절했던 일… 지금 힘든 상황의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 맞춰지면서 회개의 눈물과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 후 그녀에게 거짓말 같은 변화가 찾아왔다. 교회에서 만나는 교우들이 그렇게 정답고 좋을 수가 없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을 향한 우애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개를 들었다. 형제들은 그녀를 두고 “새 사람이 됐다” “천사가 되어 돌아왔다”는 말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바로 전도다. 복음을 전파하게 된 계기도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파트 동대표를 맡아 주민들을 만나는 일이 잦아지면서 “하나님 믿어보세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라는 말을 건넨 것이 전도의 시작이었다.
늘 웃는 얼굴과 다정다감한 성품에 호의를 느낀 불신자들이 그녀를 따라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영접하기를 지난해에만 6명. 올해도 2명의 태신자를 품고 전도 대작전에 나섰다. 또 교회에서 운영하는 ‘부광노인대학’의 노래학과 교수로, 찬양대원으로, 목장예배의 목자로 그녀의 재능과 은사를 한 치의 남김도 없이 하나님을 위해 ‘올인’하고 있다.
찬양사역자로의 ‘히트’ 기도해주세요
부광교회는 전도지 앞면에 이용순 권사의 얼굴 사진을 전면에 배치, “제가 다니는 부광교회로 오세요”라는 문구를 넣었다. 30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와일드캣츠의 ‘지윤경’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함게 그녀가 요즘 주력하는 사역이 있다. 인기스타였다는 매력을 살려 간증집회를 인도하는 일이다. 진솔한 입담으로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와 하나님을 만난 체험담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을 조화롭게 버무린 뒤 그녀의 주특기인 찬양을 통해 은혜와 감동을 전하고 있는 것.
“인기, 명예, 돈… 세상에 적을 두고 살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행복과 평안을 하나님에게서 맛보았습니다. 제가 느낀 이 행복을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전해주어야죠. 찬양사역자로 또 복음의 빚진 사명자로 진정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증거하며 살도록 노력할 겁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찬양사역자로 서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다는 이용순 권사.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찬양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그녀의 비전이, ‘짜라라짜짜짜’라는 유행가보다 더 큰 ‘히트’를 치지 않을까.